홍기빈 소장의 '조국 사태와 진보의 윤리'를 다시 생각한다
홍기빈 소장의 '조국 사태와 진보의 윤리'를 다시 생각한다
  • 최자영(전 부산외국어대 교수)
  • 승인 2019.10.29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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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변의 인간성을 가진 인간을 도덕성으로 비난하지 마라 -
칼폴라니연구소의 홍기빈 소장
칼폴라니연구소의 홍기빈 소장

인간의 이기심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고금동서, 너나 가릴 것 없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홍기빈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소장이 <조국 사태와 진보의 윤리>를 경향신문에 기고했다(2019.10.25.). 여기서 홍소장은 신자유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누구나 매일매일 일상에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확고한 개인의 행동 윤리이며, 그 내용도 너무나 명쾌하여 토악질이 날 정도이다. ‘법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이웃과 윤리와 공동체에 대한 모든 고려를 제쳐두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너의 잇속을 챙겨라’”는 것이다.

홍소장은 “조국 교수 일가의 행태는 바로 이런 신자유주의 행동 윤리를 알뜰하게 실천한 것임이 명백하다”고 한다. 홍소장은 여기서 오류를 범하였다. ‘법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잇속을 챙기는 것’은 고래로부터 인간이 언제나 그래왔기 때문에 구태어 신자유주의를 끌어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홍기빈 소장은 정책과 제도의 시행을 행동 윤리로 바꾸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정책과 제도를 고치기 위해서는 행동 윤리가 전제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보편적 복지라는 제도를 확립하려면 ‘세금 징수를 놓고 계층으로 갈라져 서로 더 내라는 싸움’ 대신 ‘함께 내어 함께 돌보고 함께 즐기자’라는 전혀 다른 원칙으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어 내야 한다고 하고, 또 ”임금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차별을 당연히 여기는 생각’을 넘어서서 ‘우리 모두 일해서 살아가는 똑같은 이웃’이라는 원칙을 사람들이 가져야 하고, 또 “살인적 경쟁과 배제의 수단이 되어 버린 교육 제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내 새끼’가 아닌 ‘우리 모두의 아이들’이 먼저라는 원리를 터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홍기빈 소장이 주장하는 원리들, ‘함께 내어 함께 돌보고 함께 즐기자’, ‘우리 모두 일해서 살아가는 똑같은 이웃’, ‘내 새끼’가 아닌 ‘우리 모두의 아이들’이란 원칙은 이상적이지만 현실성이 없다. 지금 한국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기심의 인간에게 이런 미덕은 예외를 제외하고는 실현되지 않았다. 이런 이상적 원리를 앞세우는 홍소장의 주장이 갖는 가장 큰 오류는 사람들이 그런 원리를 실천하지 못했을 때를 대비한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홍소장의 원리가 희망 사항으로 끝나버릴 뿐 구체적 대안이 없다는 점은 그 주장이 공허한 울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이번 조국 사태의 핵심은 조국 혹은 그 가족의 도덕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국이 윤석열과 갖는 차이점, 그것은 전자가 검찰 막강한 권력이 갖는 구조적 문제를 겨냥했다면, 후자는 조국 및 그 가족의 집안 문제를 ‘집중적’으로 들추어냈다는 점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윤석열에 의한 수사가 도덕성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다. 조국의 딸이 의혹의 대상이 되어 표적수사를 받는데도, 나경원의 딸은 그 같은 수사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는 점이 조국 사태가 단순한 도덕성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설사 똑같은 이기심, 인간으로서 없앨 수 없는 이기심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실천했다 해도, 그럼에도 제도를 고쳐야 하겠다고 마음먹는 자와 그런 마음, 관심조차도 숫제 없는 자는 서로 같지 않다. 그런 점에서 조국은 ‘맹랑하게도’ 기득 보수의 아성에 도전하여 제도를 개혁하고자 한 자가 당하는 마녀사냥의 전형적인 예이다. 심지어 조국은 법조 재판관들의 조직적 비리 개혁의 방안으로 민간인을 재판관으로 투입하는 참심제도를 도입하겠다고 천명한 바 있다. 이것은 권위와 기득 특권으로 똘똘 뭉친 법조계에서는 대단한 도전으로 비쳤을 것이다

전쟁과 군국주의의 사회적 환경에서 질곡의 원인을 찾았던 투키디데스

기원전 5세기 말 약 30년에 걸친 그리스의 내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썼던 투키디데스가 후대 인류에게 남기고 싶어 했던 교훈이 있다. 그 교훈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인간성을 가진 인간들에게 남긴 것이다. 인간은 두 가지 상반된 성질을 가지고 있다. 탐욕과 사랑,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근 30년의 전쟁을 거치면서 투키디데스는 인간성이 변하지 않으므로 이런 전쟁은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고, 가능한 한 그런 질곡을 그런 질곡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냈다.

투키디데스가 생각해낸 방법은 상반된 양면의 인간성 가운데서 긍정적인 면을 더 조장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고, 그것은 전쟁이 아닌 평화였다. 전쟁은 부정적인 인간성인 탐욕을 더욱 부추기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평화가 아닌 전쟁을 야기하고 부추기는 원인도 사회적 환경에서 찾았는데, 그것은 조직적 무력, 군사력의 성장이었다.

투키디데스는 인간을 도덕성을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해낸 사회적 문제와 그 해결책은 시종 인간이나 인간성 자체가 아니라 전쟁과 평화, 혹은 조직적 군사력의 성장이라는 사회적 제도와 관련된 것이다. 그는 인간의 도덕성 혹은 비도덕성은 영원불변으로 인간의 힘으로 개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같은 전제 하에서 그는 사회 질곡의 원인을 인간성 자체가 아닌 사회 제도적 차원에서 찾았다.

투키디데스가 전쟁의 원인을 인간의 탐욕, 즉 인간성 자체에서 찾지 않았던 사실은 뜻하는 바가 크다.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은 능력이나 도덕성에서도 대동소이하다고 본 것이다. 누가 다른 누구에 대해서 도덕성을 가지고 비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같은 인간성을 가진 인간이 다른 인간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자신의 허물을 감추는 위선이거나, 아니면 영원불변의 인간성을 가진 인간이 도덕적이 되기를 바래는 허황한 몽상이다. 홍소장이 말하는 ‘함께 내어 함께 돌보고 함께 즐기자’, ‘우리 모두 일해서 살아가는 똑같은 이웃’, ‘내 새끼’가 아닌 ‘우리 모두의 아이들’이란 원칙이 바로 그런 몽상에 해당한다. 이상적이지만 실현 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는 허황한 몽상 말이다. 그래서 사회적 문제는 한 개인이나 가족의 도덕성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 사회제도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홍기빈 소장은 거꾸로 정책 제도보다 윤리에 초점을 두었다

홍기빈 소장은 투키디데스와는 정반대로 방향을 잡았다. 제도가 아니라 윤리로 초점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는 “신자유주의는 무슨 쌈박한 정책 제도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고 하고, 이는 “신자유주의가 단순한 정책과 제도의 조합이 아니라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행동 윤리인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어서 “조국 일가의 변칙적 행동들은 분명코 개인의 잇속을 채우는 행동이었을 뿐, 공동체와 윤리를 고려한 행동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들”이라고 일갈한다.

나아가 홍소장은 “이른바 진보 진영에 속한다고 간주되는 지식인, 정치가, 심지어 유력 매체까지 일제히 나서서 한목소리로, ‘입시 시스템이 이런데 어쩌란 말인가?’ ‘공직자는 물질적 욕심을 추구하면 안 된단 말인가?’ ‘법적으로 허용되는 한에서 가장 유리한 상속 방식을 취한 것이 뭐가 문제인가’, “조국처럼 살지 않은 자부터 돌을 던져라”, “조국 교수가 불법이라도 저질렀단 말인가?”를 외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조국에 대한 이 같은 방어는 도덕성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는 점을 홍소장은 깨닫지 못했다. 이런 변명은 조국 사태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그 원인이 홍소장이 말하는 개인 및 그 가족의 도덕성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사회적 제도의 결함과 그 개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의혹이 난무하여 예단할 수는 없는 상황이지만, 실제 조국 일가의 비리 여부와 무관하게 ‘조국 사태’는 한 개인이 아니라, 너나 가릴 것 없이 똑같은 인간성을 가진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사회적인 문제라는 말이다.

정치검찰 쿠데타 의혹

이번 조국 사태를 두고 SNS(사회적 소통공간)에서는 “정치검찰 전면 등장”, “집권 3년차 마침내 검찰이 마각을 드러내다” 등 검찰을 비난하는 말들이 떠다닌다. 또 검찰에서 수사하는 피의 사실이 언론에 공개된 사태를 두고, 다른 나라의 유사한 사례가 소개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1945년 패전 후 자주파와 친미파가 대립 갈등했는데, 자주파의 내각이 단명한 이유가 미국의 공작에 의한 것으로 의심하기도 한다. 친미파가 득세하는 과정에서 검찰의 표적 수사와 피의사실 유포, 또 이것을 언론이 대서특필하여 대대적으로 여론몰이를 진행함으로서 반대 세력의 정치적 퇴출을 유도했다는 주장이다.

더 적나라한 사례로 브라질이 ‘세차(차 씻기) 작전 (Operation Car Wash)’를 들기도 한다. 이 작전은 브라질 고위급 정계, 재계 인사 수백 명이 연루된 브라질 최대의 부패 스캔들인 페트로브라스 사건이다. 2014년 3월 세르지우 모로 판사의 주도로 시작된 이 세차작전은 부패척결이라는 명분을 둘렀으나, 그 숨은 목적은 우파 사법부와 보수 언론이 합작하여 집권 좌파 노동당의 부패를 집중 부각시켜서 현직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를 탄핵시킨 것이라는 의혹이다, 2018년 대선에서 선두를 달리던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 룰라 전 대통령을 구속시키고 그 피선거권을 박탈했다. 그 대선에서 극우파 보우소나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세차작전의 영웅 모로는 보우소나르 정부의 법무부 장관으로 입각했다는 것인데.

브라질 온라인 저널 ‘더 인터셉트 (The Intercept)’의 보도에 따르면, 모로 판사가 세차작전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검찰과 긴밀하게 내통했고, 기소를 하는 검사와 판결하는 판사가 한 통속이 되어 공모를 했다는 것이다. 모로는 룰라를 어떻게 공격해야 하는지를 언론을 통해 검찰에게 알려주기까지 했고, 검찰은 증거가 약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소를 강행했고, 모로 판사는 서슴없이 유죄 판결을 남발했다는 것이다. 룰라 역시 감옥에서 진행한 ‘더 인트셉트’와의 인터뷰에서 “세차작전의 배후에 미국 법무부가 있지 않나”하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고 한다.

이같은 사실은 ‘정치법비(法匪, 정치에 간섭하는 법조계 도적)’들이 주도한 한 편의 ‘정치 쿠데타’로 해석되곤 한다. 과거에 중남미에서는 미국이 배후조종한 쿠데타를 통해 독재자들이 권력을 찬탈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졌던 것으로 의혹을 사고 있다. 이런 흑역사 때문에 중남미 사람들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사법부의 권력을 남용하는 ‘사법 사태(lawfare)’를 ‘신형 쿠데타’로 규정하기도 한다. 군사 쿠데타 대신 사법전쟁이라는 신종수법을 통하여 기존 특권층인 외국정부 혹은 국제자본이 정치에 개입하고 주권을 훼손한다고 보는 것이다.

홍기빈 소장이 연구하는 칼폴라니가 개인 도덕성을 담론으로 한 적이 있는가?

경향신문에 실린 홍소장의 글은 “나는 개인 차원의 윤리 도덕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다. 하지만 이번 한 번만 예외로 용서해 주시길 빈다”라는 전제 하에 실린 것이다. 차라리 예외 없이, 홍소장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그대로 “개인 차원의 윤리 도덕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 좋을 것 같다.

또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소장으로서, 홍소장이 연구하고 있는 칼폴라니가 홍소장이 이 글에서 한 것처럼 사회 구조적 문제가 아닌 개인 도덕성 문제를 ‘예외적’으로, 아니면 본격적으로라도 다룬 적이 있는지 돌아보고 한번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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