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시민들의 맞대응 전략은 어디까지인가?
[시론] 시민들의 맞대응 전략은 어디까지인가?
  • 최자영 (전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
  • 승인 2019.11.04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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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시민집회의 한 장면 (출처; 한국일보 제공)
시민들의 직접 참여가 늘고 있다. 시민집회의 한 장면 (출처; 한국일보 제공)

상해 황포탄 저격사건을 두고 입장을 달리한 상해임시정부와 의열단

1922년 3월, 상해 황포탄에서 의열단이 일본의 다나카 대장을 저격했다.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이 각각 저격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 사건은 상해는 물론 전 중국과 일본, 한국까지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일본 총영사관은 자신들이 관할하는 공동 조계는 물론 한국 독립운동에 우호적이었던 프랑스 조계에서 압력을 넣어 한국 독립운동을 단속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따라 공동조계와 프랑스 조계의 경찰 당국은 ‘불온행동’ 단속 강화 방침을 공포했다. 골자는 한인독립운동가의 총기류 휴대를 억제하겠다는 것이었다. 주중 미국 공사 샬먼은 “조선인 독립당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공산주의자의 행함과 같은 잔혹은 수단으로 나오는 데 대해 미국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든지 찬성치 아니하는 바이다”라고 유감의 뜻을 표했다. 문제는 여기에 우리의 상해 임시정부까지 가세한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는 “세관 부두의 폭탄사건(다나카 저격사건)에 대해 가정부(假政府 임시정부)는 하등의 관계가 없으므로 저들의 행동에 절대로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는 성명을 냈다(동아일보 1922.4.7.). 또 임정 측 관계자는 “독립정부 측과 저들은 하등의 관계가 없으며 조선독립은 과격주의와 공포수단을 취하여 달성할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의열단은 임시정부가 격려는 못 할망정 ‘관계없다’고 선을 긋고 나서는 데 격분했다. 이 사건에 관련하여 박재혁, 최수봉이 사형당하고 김익상, 오성륜이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고있는 중에 말이다. 이런 임시정부의 논리에 따르면, 안중근이 하얼삔 역에서 이토오 히로부미를 살해한 것도 욕을 얻어먹을 일이 된다. 이것도 과격주의와 공포수단이 아니라고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때 의열단은 자신들이 무차별적 테러단체가 아니라 명확한 이념과 목표를 가진 혁명단체임을 내외에 천명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김원봉과 유자명은 북경에 있던 신채호를 상해로 초빙해서 의열단의 주의·주장을 담은 선언문 작성을 요청했다. 신채호 역시 의열단의 직접행동을 지지하고 임정의 외교독립론에 부정적이었으므로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의열단 선언문’이라고도 불리는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이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國號)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조건의 필요성을 다 박탈하였다”로 시작하는 <조선혁명선언>은 “식민지 민중이 빼앗긴 나라와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 행하는 모든 수단은 정의롭다”고 선언했다.

‘강도 일본의 구축’을 위한 혁명뿐 아니라, 의열단은 ‘민중혁명론’을 제시했다. “구시대의 혁명으로 말하면,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고 그 위에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 세력이 있어 그 소위 혁명이란 것은 특수세력의 명칭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금일의 혁명으로 말하면,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하여 하는 혁명인 고로 ‘민중혁명’이라 ‘직접혁명’이라 칭한다.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 불평·부자연·불합리한 민중 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민족, 같은 국가 내에 어떠한 차별과 억압이 없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부분이 바로 <조선혁명선언>이 갖고 있는 아나키즘(권력분산주의; 흔히 무정부주의로도 번역됨)적 요소이다.

신채호는 ‘민중’과 ‘폭력’을 혁명의 2대 요소로 내세우고, ‘이민족 통치’, ‘특권계급’, ‘경제약탈제도’, ‘사회적 불균형’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대상으로 규정했다. <조선혁명선언>은 “이천만 민중은 일치로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 또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의 제도를 개조해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인 조선을 건설할지니라”라고 끝을 맺는다.

의열단이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1924.4월말 결성)은 일제에 대한 무력투쟁을 통해서만 나라의 독립과 인간해방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던 독립운동 조직들이었다. 의열단이 <조선혁명선언>의 집필을 맡긴 신채호뿐 아니라, 도산 안창호도 의열단에 탄피제조기를 구입해주었고, 또 임시정부의 별동대로 불리던 <구국모험단> 단장 김성근도 의열단의 김원봉, 이종암 등과 상해에서 합숙하면서 폭탄제조법과 사용법을 배웠으며, 이들은 모두 가까운 사이였다. [위 내용은 이덕일, “의열단 직접행동과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온누리평화시민대학 창립총회 (2019.11.2. 서울 인사동 천도교 수운회관) 자료집을 참조한 것이다]

여기서 반성해야 할 것이 있다. 상해 임시정부가 주장한 것처럼 “조선독립은 과격주의와 공포수단을 취하여 달성할 것이 아니다”가 맞는 것인지, 아니면 의열단 <조선혁명선언>의 주장처럼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하는 점이다.

여기서 ‘맞대응’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폭력–암살·파괴·폭동은 언제나 동원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저편’이 그런 수단에 의지할 때는 ‘이편’도 같은 방법으로 대응하는 것이 맞대응이다. 이런 논지에 반대도 물론 있을 수 있다. 폭력에 대한 비폭력 저항, 또는 기독교의 용서와 사랑의 윤리가 그런 것이다. 그런데 폭력에 폭력으로 저항하는 맞대응의 논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낳기도 한다.

첫째, 맞대응이 반드시 폭력을 조장하거나 끝없는 폭력으로 이어지기보다 폭력 자체를 억제라는 역설적인 효과를 낳기도 한다. 내가 폭력을 행사하면 상대도 같은 방법으로 대응할 것이라는 기대치가 나의 폭력 행사를 재고하고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대응하지 않으면 상대가 기고만장하여 폭력을 더욱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맞대응의 두 번째 효과는 보신주의로 흐르는 무기력함을 경계하는 것이다. 폭력의 저항을 거부하는 많은 이들은 희생을 두려워하고 기피한다. 입으로 비폭력 저항을 말하고 용서·사랑의 윤리를 말하지만, 사실 저항도 사랑도 아닌 사리를 추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의열단의 폭력 저항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상해 임시정부가 사리를 추구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사실 폭력의 저항이 가져올 더 큰 희생을 기피하는 소극적인 경향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안중근이 이토오 히로부미를 죽인 사건을 두고 “그래, 안중근이 이토오 히로부미를 죽였다고 세상이 달라진 게 뭐가 있나?”라고 반문하는 이가 있다. 그 대답은 이러하다. “안중근이 그를 죽인 것을 보고도 그를 따르지 않고 방관한 많은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바뀌지 않은 것이다”. 37년의 일제 식민지배 시기에도 3.1 저항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민중의 동요는 거의 없었고, 오히려 학도병, 강제징용, 위안부 등의 인력 차출, 대동아 전쟁에 필요한 물자 징발 등 일본의 강제조치에 대해 조선 민중은 말없이 그 희생을 감내했다.

해방 후 공권력 및 우익테러에 의한 인명의 희생과 맞대응의 부재

상해 임시정부가 폭력의 과격·공포수단을 배격한 것은 사실 임시정부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더 오래 조선인의 전통에 내재한 봉건적 수동성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그 수동성은 해방 후 정국에서 나라의 운명은 물론 인명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제주 4.3항쟁, 여수·순천 항쟁, 4.19 의거, 10.16 부마항쟁,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의 6.10항쟁, 최근의 촛불혁명 등을 두고 우리 한국인이 대단히 저항적인 민족인 것으로 평가하려는 이가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굵직한 사건들은 우리 저항의 비일상적 일회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마침내 터져나왔지만, 그 숱한 세월을 침묵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 남한에서 벌어진 우익 테러에 의해 김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그 한 예로, 미군정 시기 1946년 11월 결성된 서북청년단은 극우 반공주의 청년 단체로서 우익 테러에 앞장을 섰고, 1948년 난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궐기한 제주도 4.3항쟁의 토벌에도 정부의 군대와 경찰들과 함께 관여했다.

1948년 이후 1960년 4.19 의거가 일어나기까지 이승만 독재체제는 20년 이상 지속되었다. 특히 6.25사변이 일어나자 수많은 이들이 재판도 없이 끌려가서 죽었다. 그 주검은 지금도 경산 코발트 폐광의 갱도에 차곡차곡 쌓여있단다. 노무현 정부 때 발굴되다가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중단된 채 국가 공권력에 의해 살해된 남한 사람들의 주검이 여전히 어두운 갱 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하에서 국가 권력이 저지르는 만행은 식민지배 시기 일본이 저지른 만행보다 덜하다고 결코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 대신 미국이 등판으로 등장한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그 압제 밑에서 민중은 근 20년을 침묵했고, 4.19가 일어나기까지 그 오랜 세월 동안 결정적인 민중의 저항은 없었다.

4.19 의거로 1년여의 막간을 거친 다음 일어난 1961년 5.16 군사 쿠데타에 의해, 한국은 여전히 독재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 20년 세월을 보냈다. 1972년 유신체제의 선포로부터 1979년 박정희 피살로 이어지는 세월 동안에도 크고 작은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다수 민중은 침묵을 지켰다.

식민지배와 독재의 잔재, 타인구조 금지 원칙

세상은 소수의 영웅이 아니라 다수 민중이 자각하고 궐기했을 때에 바뀐다. 촛불혁명은 그 산 증거이다. 능력 있는 지도자가 나타나 잘 살게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망상이고 자신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기는 동시에 자신은 다치지 않으려는 나태하고 비겁한 행위에 불과하다.

지금도 공권력의 오남용을 부추기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 그대로 남아있는 민중의 나태함과 무기력이다. 한 예로 한국의 법질서에서는 원칙적으로 ‘타인구조’가 원칙적으로 인정이 되지 않고 있다. 타인구조란 피해자 아닌 제3자가 피해자를 대신하여 고발함으로써 피해자를 도와줄 수 있는 제도를 말하는데, 한국은 이 타인구조를 제도적으로 막고 있다. 피해자가 스스로 자신을 구조할 수 없는 경우에도 그러하다.

이런 타인구조 금지 원칙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남의 불행과 억울함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풍토를 조장해왔다. 자기밖에 모르고 남의 처지에 무관심한 인관, 사회 정의 실현에 무감각한 인간을 양산하며, 한국 사회의 이기주의와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이 타인구조 금지의 원칙이다. 이런 원칙은 합심하여 독립운동을 할까 봐 겁을 내던 일제 식민지배의 잔재, 또 합심한 민중의 궐기를 겁내던 독재 권력의 음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촛불혁명에서 맞대응 전략으로

광화문 촛불혁명으로 박근혜 전대통령을 탄핵하여 몰아낸 이후 전에 보이지 않던 풍경이 등장했다. 이른바 광화문 태극기와 서초동 촛불로 상징되는 민중 시위대이다. 대단한 태극기 부대가 국민이 다수표로 뽑은 대통령을 빨갱이로 몰고 퇴진운동을 벌이고 있다. 박근혜를 촛불로 몰아내었으니, 문재인도 같은 방식으로 몰아내겠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민중의 시위가 향하는 곳은 법제도에 준한 것이 아니라 초법적인 민중의 뜻을 관철하려는 것이다. 소수이 다수든 간에 민중이 모이기 시작했다.

결국, 광화문 태극기든 서초동 (혹은 여의도) 촛불이든 그 어느 편이 기선을 잡을 것인가는 역사가 증명할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법 위에 민중의 뜻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깨닫기 시작한 사실이다. 태극기 부대가 난리를 치면 촛불 부대도 가만히 안 있을 것이고, 또 촛불 부대가 검찰 개혁과 공수처 설치 혹은 ‘조국 수호’를 외치면 태극기 부대는 다시 ‘조국 빨갱이, 문재인 빨갱이’를 이를 외쳐댈 것이다. 이것이 맞대응이다.

촛불혁명을 계기로 한국 민중은 적극적인 ‘맞대응’의 길로 들어섰다. 그 맞대응은 태극기와 촛불 부대 간의 충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공권력의 오남용에 대한 민중의 저항권 행사로 이어져야 한다. 민주화의 길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기관으로 독버섯같이 남아서, 기준도 없이 꼴리는 대로 수사하지 않거나 표적 수사하는 독재 검찰권력의 횡포, 잣대도 없는 ‘양심’을 빌미로 헌법과 법률을 개무시하는 법원 판사들에 대해서도 민중은 그에 상응하는 맞대응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한국 사법 권력의 횡포는 현재 부지기수인 사법피해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민중과 민주주의의 앞날을 암울하게 하는 식민지배와 독재의 잔재이다.

민중은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맞서서 저항해야 하며, 그 맞대응의 수위는 공권력이 잘못 행사되는 정도에 비례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맞대응이란 서로 힘겨루기의 정도가 맞아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정권이 탄핵 되기 직전 작성된 계엄령 문건에서 드러나듯이, 혹 공권력이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려하는 경우가 있다면 민중도 무력으로 맞대응하는 것을 불사할 것이다. 그러지 않는 한 시위는 평화의 촛불로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평화적이므로 촛불을 들뿐, 태극기부대와 같이 억압의 (군부)독재를 연상시키는 얼룩덜룩한 군복을 입고 등장하지도 않을 것이다.

맞대응의 수위는 일정한 것이 아니라 그 상대가 공격해오는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조선혁명선언>에서 ‘우리 생존조건의 필요성을 다 박탈한 강도 일본’에 대항하여 “식민지 민중이 빼앗긴 나라와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 행하는 모든 수단은 정의롭다”는 전제하에 폭력을 불사한 의열단의 맞대응이 ‘과격주의 및 공포수단’을 거부한 상해임시정부의 입장보다 더 적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촛불혁명은 프랑스 혁명같이 법이나 제도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자생적인 시민·민중의 저항이었다. 프랑스의 인권선언이나 1791년 헌법은 앞선 1789년 혁명의 정신에 따라 후에 제정되었다. 혁명은 법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란 말이다. 오히려 초법적 민중의 염원이 새로운 법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이다.

그리고 저항은 일상화해야 한다. 4.19 의거, 10.16부마항쟁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같이 10년 20년 만에 한 번씩 일어나는 일회성의 저항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 내용도 거시(巨視)적 독재 권력뿐 아니라 더 촘촘하게 일상에 스며있는 공권력의 오남용에 대한 것으로 미시(微示)화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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