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ECD 사법신뢰도 초안에서 한국이 꼴찌를 기록한 데 즈음하여 장하준의 “사회적 대타협” 이론을 다시 생각한다.
OECD 사법신뢰도 초안에서 한국이 꼴찌를 기록한 데 즈음하여 장하준의 “사회적 대타협” 이론을 다시 생각한다.
  • 최자영(전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
  • 승인 2019.11.26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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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신뢰도 조사 초안에서 꼴지 성적표를 받은 한국 대법원

최근 한국의 사법부 신뢰도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에서 꼴찌에서 두세 번째를 오가더니, 드디어 꼴찌를 기록했다. 해마다 OECD가 각 나라 국민 1000명에게 '법원을 신뢰하느냐'고 묻는데, 2019년 조사한 결과의 초안(草案)에 따르면, 신뢰한다'는 응답이 한국에서 가장 낮아서 37개 회원국 중 꼴찌란다.

꼴찌를 기록한 조사결과 초안이 지난 9월 대법원에 도착했다. 조선일보 기사(2019.11.5)에 따르면, 법원 관계자들은 "(대법원) 윗선에서 '한국의 순위를 어떻게든 빼야한다'는 얘기가 있었다"고 한다. 대법원은 9월 중순 외교부를 통해 OECD 본부 측에 이의 제기를 했는데, 그 핵심은 설문 문항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OECD는 사법부 신뢰도 조사를 할 때 '한국의 사법 시스템(Judicial system)과 법원을 신뢰하느냐'고 물었는데, '사법 시스템'에는 법원뿐만 아니라 검찰, 교정 당국도 포함되기 때문에 법원에만 한정된 신뢰도 조사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법원과 검찰 중 어느 곳의 신뢰도가 낮은 건지 모호하다"고 했다. 한국 대법원이 문제를 제기하자 OECD는 조만간 발간할 예정인 최종 보고서의 사법부 신뢰도 순위에서 한국은 제외할 방침이라고 한다.

이런 논란 때문에 2년 전에도 OECD의 사법 신뢰도 조사에서 한국은 빠졌다. 대법원 관계자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인 2017년에도 대법원에서 OECD 측에 비슷한 내용의 이의 제기를 해서 결국 최종 보고서에서 한국은 빠졌다"고 한다. 당시에도 한국 법원의 신뢰도 순위는 꼴찌는 아니었지만 하위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일보에서 위 기사를 보도하면서 OECD에 대한 대법원의 이의 제기가 일리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 이유는 독일 등 다수의 유럽 국가는 한국과 달리 법무부 산하에 법원과 검찰이 있다. OECD는 이를 감안해 2012년부터 2~3년에 한 번씩 회원국의 사법부 신뢰도를 조사할 때 '법원'(courts)과 함께 검찰 등도 포함된다고 해석할 수 있는 '사법 시스템'에 대한 신뢰도까지 한꺼번에 묻도록 질문 문항을 짰다고 한다. 조선일보가 일리가 있다고 평가한 이유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유럽과 달리 검찰이 법원 소속이 아닌데 사법신뢰도를 물으면서 법원소속도 아닌 검찰까지 넣어서 질문한 것이 한국의 경우에는 적중하지 않다는 뜻이다.

대법원과 조선일보는 다 같이 힌국의 사법신뢰도가 꼴찌가 된 것이 검찰을 함께 넣어서 평가를 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셈이다. 법원에서는 검찰이 법원보다 더 부패했다고 믿고 있는 것이 이번 법원의 이의제기에서 드러났다. 검찰 등을 포함했기 때문에 조사결과가 모호하다라고 표현했으나 사실 그런 뜻이다. 사실 민초들이 보기에는 부패의 정도에서 법원도 검찰과 오십보백보 크게 다르지 않거나 더하거나 한 것 같은데도, 법원에서는 자신이 그래도 검찰보다는 낫다고 자처하는 모양새이다.

독일에서는 검찰이 독립된 기관이 아니라 법원 소속이고, 또 법원은 행정부 소속이다. 독일은 3권 분립이 아니라 2권 분립이다. 독일에서 검찰은 법원과 행정부의 하부기관으로서 존재한다. 그런데도 검찰이 정치권력 때문에 수사를 방해받고 할 일을 못한다는 말은 회자되지 않는다. 독일은 법원이나 검찰의 권력이 각 주 단위로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기관도 원천적으로 독주가 불가능하다.

반면, 한국의 검찰청은 각종 권력을 독점하고 중앙의 검찰청장이 인사권을 장악한 가운데, 다른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하고 있다. 원론적으로 사법권력이란 각기 독립기관으로 분쟁 당사자 양쪽에 공평한 입장에서 판결함을 뜻하나, 행정부 소속의 검찰은 태생적으로 종속된 관료이므로 그렇지 못하다.

특히, 독일은 기소법정주의로서 검사가 기소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검찰이 굳이 피의자를 죄인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피의자의 무죄를 위해서 변론하기도 한다. 이런 점이 한국과 다른 점이다. 한국에서는 검사가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편의주의로서, 혐의가 있는 자를 불기소하기도 하고, 또 혐의가 없는 자를 기소한 다음 자신의 면목을 지키기 위해 기소된 자를 죄인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쓰기도 한다. 피의자에게 유리한 증거는 가능한 한 없애거나 무시하고 불리한 증거만 모으는 것이다.

 

이번 <조국 사태>를 통해 드러난 사실로써, 한국의 검찰은 행정부 소속이지만 그 행정부로부터도 독립을 지향한다. 그래야 이른바 살아있는 권력을 심판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권력의 칼자루를 휘두르는 검찰 자신이 사실을 조작하고 문서를 위조하는 범죄를 저질러도 견제하고 처벌할 기관이 현실적으로 없다는 점은 한국 사법체계가 갖는 치명적인 문제점이다.

한편, 윤석열 검찰총장이 이른바 살아있는 권력을 겨냥하여 선별적으로 표적수사를 하면서도 정의의 실현을 표방한 것은 준사법 권력으로서 지위를 자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OECD 사법권력 신뢰도 조사에서 반드시 한국의 검찰이 제외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법원 소속은 아니지만, 검찰 자신이 준사법 권력으로 자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일보의 평가와는 달리, 법원이 OECD 본부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반드시 일리 있는 처사라고 보기가 어렵다. OECD 사법신뢰도 조사에서는 검찰까지 넣으면 안 된다고 주장을 하고, 실제로는 행정부 소속의 검찰이 마치 독립된 사법 권력인 것처럼 천정부지로 칼날을 휘두르는 모순된 상황이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사법권력의 부패는 한국 사회전반의 부패와 불평등을 노정한다

사법권력의 부패는 그 일탈을 용인한 입법부는 물론 경찰, 검찰 등 준()사법권력으로서의 행정부 권력의 부패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한국 사회 전반의 부패를 노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특히 한국의 경우 정치권력의 부패는 수십 년 간 이어져온 독재정권과 개발독재에 편승한 재벌의 경제력집중으로 인하여 만연한 사회적 불평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견제장치 없이 집중된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고, 그 집권은 현실적으로 물리적 힘을 배경으로 해서야만이 유지가 가능하다. 국가권력의 경우 그것을 지탱하는 물리적 힘은 경찰, 군대의 힘이다. 군사력의 증강은 언제나 외적 방어를 빌미로 하는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그 무력은 내적 불평등을 고착화하고 기득 특권을 강화하며 권력의 비민주적 독재화에 번번이 이용되곤 한다. 또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시정의 요구는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어 빨갱이의 소치로 몰리곤 한다.

같은 맥락에서 개발 독재정권에 의해 성장해온 한국의 재벌이 갖는 경제 집중력은 태생적으로 비민주적 독재 권력과 밀착되어 있다. 국내 재벌의 존재가치를 대외자본의 침투에 대한 대항마로서 정당화하는 논리는 일면 외적 방어를 빌미로 하는 무력의 증강과 같은 맥락에 있다. 그 재벌의 경제 집중력이 복지가 아니라 사회 불평등의 고착화를 더욱 강화할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그 한 예로서,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소액주주운동의 주주(株主)민주주의를 매도하고, 이것이 국내 산업자본의 약화와 외국금융자본에 유리한 시장 환경을 조성한다고 비판한 사실이 이와 유사한 맥락에 있다.

 

유럽식 '사회적대타협' 이론을 설파했던 장하준은  진보진영에서 벌이는 '소액주주운동'의 주주(株主)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이런 운동이 국내 산업자본을 약화시키고 외국금융자본들에 유리한 시장 환경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유럽식 '사회적대타협' 이론을 설파했던 장하준은 진보진영에서 벌이는 '소액주주운동'의 주주(株主)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이런 운동이 국내 산업자본을 약화시키고 외국금융자본들에 유리한 시장 환경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장하준의 유럽식 사회적 대타협이론은 정치적 발언권이 없는 한국 민초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미 12년 전인 2007년이니 노무현 정부 시절 '민주화, 경제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제목으로 한 강연[<프레시안>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 공동 개최, '민주화 20, 한국사회 어디로 가나?' 세 번째 강연]에서 장하준은 진보진영에서 벌이는 소액주주운동의 주주(株主)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이런 운동이 국내 산업자본을 약화시키고 외국금융자본들에 유리한 시장 환경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는 바깥 적의 존재를 빌미로 해서 안으로 민주주의 발전을 유보하는 것이다. 장하준이 강연한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에 대해 재론하는 것은 사법신뢰도 꼴찌인 오늘의 현실이 우연이 아니라 주주(株主)민주주의를 폄하한 장하준과 그 아류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다는 점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장하준이 재벌들에게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견해를 개진한 이유는 국내 재벌이 국외자본의 침투를 막는 방편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재벌의 경제집중력에 의한 사회 정치적 불평등 및 경제적 약자로서 노동자 권익의 침해 가능성에 대비한 구제장치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그가 제시한 사회적 대타협론 및 그를 통한 복지국가 성립은 선언적 수사에 불과할 뿐, 재벌의 경제적 집중력에 의해 이미 기울어져있는 운동장에서 재벌과 국민간 타협이 복지국가를 실현할 만큼 바람직하게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장하준은 대타협의 주체를 주주민주주의와 노조에서 두루뭉술한’  개념의 국민으로 바꾸었다

장하준은 '사회적 대타협'의 사례를 북유럽식 복지국가 체제에서 찾는다. 스웨덴 노조가 주체가 된 대타협 성공의 예를 한국에는 적용하려 하는 것이다. 다만 그는 한국의 경우 대타협의 주체가 노조임을 부정한다. 스웨덴처럼 노조 중심으로 사회적 대타협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고 보는 것이다.

대타협의 주체가 재벌과 국민이 되어야 한다는 장하준의 주장은 자못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허구의 이상에 불과할 뿐, 재벌과 국민이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타협의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국민은 추상적인 개념일 뿐, 단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국민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다른 하나는 재벌이 갖는 경제 집중력이 행정부는 물론 입법부 국회, 사법부 법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데가 없을 정도여서 민초는 아예 협상이나 대적의 상대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하준 스스로도 국민이 특정되지 않은 두루뭉술한 개념임을 인정한다. 다만 그것은 소액주주나 노동조합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장하준은 노조를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노조가 아직 약하고 정당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대신 국민의 개념을 도입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는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역사가 오랜 나라보다 아직 계급분화가 깊이 진행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국민이라는 카테고리(개념범주)가 의미 있다고 생각 한다고 말한다.

장하준은 유럽식 대타협을 한국에도 이식하고 싶어 했으나, 독재 권력을 배경으로 성장해온 한국 재벌이 가진 경제 집중력은 그런 민주적 타협의 가능성을 초월해있다는 점을 충분하게 고려하지 못했다. 복지사회나 일자리 창조를 위한 대타협은 고사하고 노동자들의 열악한 작업환경이나 근로조건은 기본적 인권조차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사회적 대타협자체가 있을 수가 없고, 그래서 복지국가의 전망은 희박하다.

스웨덴의 대타협은 노조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 또 노조가 마음만 먹으면 그 대타협을 중지할 수도 있는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막강한 경제 집중력을 가진 재벌이 선심을 쓰지 않는 한 재벌 측의 양보는 기대할 수조차 없고, 또 재벌이 대타협의 의지가 없다 해도 그들을 강요할 아무러한 발언권이나 제도적 장치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장하준의 민주주의 개념은 추상적이고 피상적이다

장하준은 1987년 이래 당시까지 20년 동안 한국이 정치적 민주화를 이뤘다고 평가했으나, 이런 평가 자체가 피상적이다. 아마도 장하준 자신이 표현하듯이, 유신독재 시기 표현의 자유가 없던 상황과 비교했을 때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장하준의 민주정부에 대한 이해는 거기에서 정지되어 있다. 그에게는 삶과 노동 조건은 더욱 열악해져서 젊은이들이 결혼을 회피하고 자식을 낳지 않으려 한 지경에 다다른 현실에 대한 반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 표현의 자유가 민초의 삶을 개선하는 데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장하준에게는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민주표현의 자유개념은 피상적이다.

또 장하준은 민주주의를 아주 협소하게 한 방향으로만 이해했다. 민주주의를 다수결의 원칙에 기반 한 것이라고 정의한 데서 그러하다. 그리고 다수결 원칙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시장주의와는 배치가 된다고 했다. “시장이라는 곳은 '1() 1'이고 민주주의는 '11'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민주주의를 형식적인 투표 방법으로만 생각했고, 내용으로서의 민주주의를 고려하지 않았다. 사실 민주주의란 경직된 형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중요하며, 그 형식은 상황에 따라 중의를 모아서 얼마든지 변경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장하준이 말하는 시장이라는 곳은 '1() 1'이고 민주주의는 '11'와 같이 경직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시장이 '1() 1'를 할 것인가, 혹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11'로 할 것인가의 여부도 공리,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그 규칙 자체를 결정하고 변경할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란 11표의 획일적인 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정되는 내용이 민중에 의해 결정됨을 뜻한다. 그 내용이 때로는 대의제로, 때로는 ‘11로도 나타난다. 그 결정은 중의를 모으면 되는 것이고 내용은 가변적인 것일 뿐, 획일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장하준의 일방적 사고는 ”19세기에는 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노골적으로 반대했다는 언급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민주주의를 허용하면 재산이 없는 다수가 권력을 탈취해 재산이 있는 소수를 착취하고, 그렇게 되면 부의 축적 동기를 파괴시켜 경제가 망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한다. 장하준은 여기서 두 가지 큰 오류를 범하였다.

하나는 그가 19세기 사람들을 빙자하여 소개하는 이 같은 민주주의란 많은 민주주의 가운데 한 내용에 불과하다는 점을 그는 간과했다. 민주주의의 내용이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음은 이미 2,5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소개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유사한 민주주의를 급진적 형태의 민주주의로 소개하고 있다. 둘째, 장하준은 다수가 권력을 탈취해 재산이 있는 소수를 착취하게 되면 부의 축적 동기를 파괴시켜 경제가 망한다고 생각했다고 하고 있으나, 다수가 소수를 탈취하면 반드시 경제가 망한다는 등식을 과문한 필자는 어디에서도 배우지 못했다. 다수가 소수를 탈취하면 소수의 재산이 줄어드는 대신, 부의 분배가 원활해져서 다수가 윤택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장하준이 경제가 망한다고 할 때, 그 개념은 아마도 그가 지지하는 안정적 경영권을 가진 재벌이 존재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염두에 둔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겠다. 장하준의 경제정책 및 사회복지론은 철저하게 젊은 시절 자신이 목도했던 바, 재벌이 주도하는 개발독재 시대의 경제 집중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노정한다.

또 장하준은 영국은 한국보다 더 강한 계급사회로 정의하고, 그에 비해 한국은 그 정도는 아니다고 한다. 예를 들면, “한 상류층 영국인이 학교 다닐 때 축구를 하면 선생님한테 혼났다고 한다. 상놈 운동한다고. 계급의 골이 깊어서 그런 것인데 우리나라는 그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때 그가 사용한 계급 개념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로 쓰인 것인지는 정의하기 어려우나, 마르크스 이래 사회과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사회경제적 계급과는 직접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영국에서 전통적으로 존재하는 귀족, 평민 등의 신분 구분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말하는 계급과는 구분되어야 하고, 나아가 정치권력의 평등한 배분과 관련된 근대 민주주의와는 다른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장하준은 영국의 봉건적 전통의 사회신분과 근현대 경제적 사회계급을 혼동하고, 그 때문에 영국이 한국보다 더 심한 계급사회로 이해한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탈이다. 주지하다시피, 영국은 사회보장제도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잘 구비되어 있다. 사회 안정망을 심하게 결여하고 있어 영국의 발치도 따라가기 힘든 한국보다 영국이 더 불평등한 계급사회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논의의 핵심을 한참 비켜가는 것이 된다.

 

장하준의 대타협의 주체는 쌍방이 아니라 일방만 존재 한다

장하준은 자본주의 경제학에 일가견을 가졌으나 민주주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 민주주의란 집중이 아니라 분산에서 온다. 정치권력, 경제력, 그 어느 것이든 같은 맥락에 있다. 개발독재의 권력집중이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초래했던 것이 바로 그러하다.

장하준이 재벌이 안정적 경영권을 갖는 체제를 지지한 것은 그가 오직 그 하나에만 절대적 가치를 부여했다는 뜻이고, 그 밖의 것이 갖는 장점은 죄다 무시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스스로 가치를 부여한 대상이 사견에 불과하단 사실을 간과하고 일반적 가치로 승화시키려고 했다. 그런 그의 입지가 바로 독재의 온상이 된다는 사실조차 장하준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개발독재시대 의 유산인 재벌의 안정된 경영권을 지지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 있다.

장하준이 주주민주주의 운동을 폄하하고, 또 첨예한 이해당사자인 노조를 대타협의 주체에서 배제하는 대신 두루뭉술하게, 모호한 국민의 개념을 도입할 때, 이미 그는 재벌의 경제집중력이 낳을 갖은 사회, 정치, 경제적 부작용을 묵인하겠다는 저의를 가졌던 것이다. 재벌의 안정적 경제력은 확실하고 구체적이지만, 그에 대응하는 국민이라는 존재는 모호하기만 할 뿐, 실체가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주주민주주의와 노조를 폄하한 장하준은 재벌의 경제 집중력에 대응할 어떤 존재를 원천적으로 설정조차 하지 않았다. 여기에 는 대타협의 쌍방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만 확실하게 존재할 뿐이다.

장하준은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경직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가 “'노조가 세다'는 스웨덴도 자본주의를 폐지 못 했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 한다.”고 말한 것만 봐도 그러하다. 이 때 장하준이 말하는 자본주의란 어떤 개념의 것인지가 우선 불분명하다. 아마도 그가 지지하는 안정된 경영권을 가진 재벌 자본주의를 뜻하는 것일 수 있다. 여기서 장하준은 자본주의를 존속 혹은 폐지의 흑백논리로 파악하고, 수정 자본주의가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스웨덴 노조가 이루어낸 대타협 자체가 자본주의를 다소간 수정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구태여 자본주의를 폐기할 필요 자체가 없는 것이다.

 

사법적폐의 중심에는 헌법재판소가 태풍의 눈같이 똬리를 틀고 있다

OECD 사법신뢰도 조사에서 꼴찌의 영예를 차지한 데로 이야기를 돌려보자. 지금 회자되고 있는 사법적폐는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일제식민지 지배는 물론 이승만, 박정희 독재 시기에도 사법 권력은 정치권력의 주구 노릇을 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바로 전두환 군부독재가 무너진 1987년 이후에도 사법권력 농단이 지속되었다는 사실이며, 그 한가운데에는 공권력의 감시를 포기한 헌법재판소가 있다.

헌법재판소는 1987년 헌법에서 공권력의 오남용을 감시하는 기관으로 설립되었다. 그런데 출발할 때부터 하위법인 헌법재판소법 제68조 제1항에서 재판소원을 금지했다. 재판을 거친 것은 감시하지 않겠다는 뜻을 천하에 공지한 것이다. 재판이 잘못된 것을 구제받을 수 있는 장치를 원천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오늘날 사법권력 농단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뿐 아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7, 노무현 정권 마지막 해에 형사소송법이 개발되었는데, 거기에서 갖은 권력을 독점한 검찰의 권력을 더욱더 견제받지 않는 무소불위 권력으로 만드는 법의 개악이 있었다. 2007년까지는 검사의 불기소 처분에 불복하여 사비를 가리기 위해 법원에 재정 신청을 하고, 그 결정에 다시 불복할 경우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2007개정형사소송법에서는 재정 결정을 거친 사건마저 소원을 금지했다. 법원에 이어 검사를 규제하는 마지막 구제 장치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법원과 검찰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곳이 다 없어진 것이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썩게 마련이라, 법원은 30, 검찰은 10년의 독주의 과정을 거치면서 둘 다 오늘날 사법적폐의 온상으로 거듭났다. 지금 공수처를 만들어 고위공직자 비리를 잡겠다고 히는 것은 지금까지 고위 공직자 사정 기관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 숱한 세월 동안 민중의 종복인 공직자가 도리어 견제 받지 않은 권력으로 민초들을 후려잡고 있었다는 말이다. 사법 신뢰도 꼴찌에 이르게 된 이 지경에도 헌법재판소의 사정 기능을 정상으로 돌리자는 여론조차 형성되지 않고 있다. 또 사법신뢰도 꼴찌 기록을 갱신하면서도 공수처 설치에는 반대한다. 그 반대는 자신같이 권력을 농단하는 기관이 하나 더 생길까봐 두려워하고, 자기만 독재를 하겠다는 소망에 다름 아니다. 기관 간 권력의 상호견제의 개념은 실종되어 버렸다.

사법신뢰도 꼴찌 성적표를 받아든 대법원이 검찰이 조사 대상에 포함되었다는 이유로 OECD 본부에 이의신청을 했단다. 마치 검찰을 빼고 법원만 조사대상으로 하면 그 신뢰도 지수가 개선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글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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