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메카’라는 자부심 갖자
‘민주주의의 메카’라는 자부심 갖자
  • 정해랑
  • 승인 2019.12.10 1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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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이부영 몽양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만나다(두번째)

얼마전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들이 하얀 민복을 입고 동아일보사에서 조선일보사까지 삼보일배를 하는 모습이 지나가는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삼보일배의 맨 앞자리를 맡으며 시종일관 결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던 어르신. 이부영 이사장입니다. 
이부영 이사장은 젊은 시절 동아일보 기자를 시작한 후 단 한 번도 역사의 현장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동아일보 해직 이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상임위원장,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 등 재야 민주화운동의 일선에서 뛰었으며, 91년 정계진출 후에도 사회문제, 민족문제에 심장 박동수를 맞췄습니다. 정계은퇴 후에는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 주권자전국회의 상임고문, 평화와 상생의 대한민국 다른백년 운동 제안자 등 젊은 사람이 무색할 만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정치와 민족의 앞날에 대해 누구보다 뜨거운 사랑과 절박한 걱정을 안고 바쁜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이부영 이사장을 어렵사리 만났습니다. 우리 사회의 정치, 언론, 평화문제 뿐 아니라 다른백년 운동에 대한 이부영 이사장의 깊은 고민을 들을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먼저 바쁜 와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이부영 이사장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인터뷰는 두 번에 나눠 게재합니다. 전문은 주권자전국회의 회보 <주권자>에 실렸습니다.

한일이 함께 동아시아평화를 이뤄야 해
한국이기에 당당하게 일본에게 말할 수 있어

정: 11월 3일은 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이면서, 일본에서는 평화헌법 제정의 날입니다. 우리가 일본과 화해할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 우리와 일본이 각각 노력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이: 우선 일본의 시민운동, 우리의 시민운동이 긴밀한 연대체를 만들어서 항상 생각을 교류하고 실행프로그램도 교류를 해야 해요. 지난 10월 21일 일본 와세다대학 전 총장인 니시하라 하루, 이와나미서점의 사장인 오카모도 아치시 두 분이 와서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이홍구, 백낙청 선생 등하고 간담회를 했는데. 거기서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 갔어요. 평화헌법을 지키는 일이나 1965년 한일협정을 바꾸는 일 등은 그건 금방 될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일본의 평화헌법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정치적 쟁점으로 부딪힐 것을 앞세우기보다 예를 들면 청소년 교환프로그램을 일 년에 50만 명, 100만 명 수준으로 해보자는 거지요. 그건 양쪽 정부가 관심 가지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스포츠나 청소년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이 교류를 해서 양쪽의 좋은 점을 서로 받아들이게 만들어서 우정을 교류하게 하자는 겁니다. 너무 예각적인 일을 먼저 하지 말고, 청소년 프로그램 문화예술프로그램 먼저 해서 아이들이 맘놓고 친구될 수 있고 편지, 인터넷도 나누게 하자는 그런 이야기도 했어요. 한마디로 말해서 싸움이 될 만한 일을 먼저 꺼내지는 말자는 거예요. 

정: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도 맡고 계시지요? 역사를 통해 현재 우리가 미래를 위해 할 일을 알아야 할 텐데요. 몽양 여운형 선생님의 삶에서 우리가 배울 일은 무엇일까요? 또 몽양께서 지금 계신다면 가장 중요하게 하셨을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이: 1919년, 20년, 21년에 처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졌을 때 분열이 크게 났어요.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면서 젊은 세력들은 사회주의혁명 쪽에 쏠려 있었고, 일부는 아나키즘에 빠져 있었고, 옛날 조선 왕정에서 높은 벼슬살이 하던 분들도 와있었어요. 서로 뭉쳐지질 않는 거예요. 그걸 노력했던 분이 도산과 몽양이었어요. 두 분이 계속 한 일이 그런 일이었어요. 
  1919년 11월 17일 그때 일본에서 영국의 인도식민통치를 모방해서 자치정부운동을 한다고 몽양을 일본 도쿄로 초청했어요. 임시정부가 발칵 뒤집혔어요. 일본이 초청한다고 가냐. 말이 안 된다. 그런데 그걸 찬성해 준 분이 도산 안창호였어요.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지명되었지만 상해에 안나타났거든요. 그러니 실질적으로 수반 역할을 한 사람이 국무령인 도산이었지요. 도산이 몽양을 믿고 보내라고 했어요. 일본 제일 큰 호텔에서 일본의 군부, 경제계, 학계, 문화예술계 근 100명 되는 지도층 모아놓고 폭탄선언을 합니다. 조선을 독립 안 시키면 일본은 망한다고 했지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풀어서 말한 거예요. 일본이 발칵 뒤집혔어요. 결국 그 여파 때문에 하라 다께시라는 일본 내각이 무너져요. 일본 지도층 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몽양을 숭배하게 돼요. 조선이 인물 없는 줄 알았는데 저런 인물이 있구나 라고들 하지요. 몽양은 신변보장을 약속 받았으니 폭탄선언을 한 뒤 유유하게 상해로 돌아가죠. 
  해방 전에 몽양이 건국동맹을 비밀리에 만들어요. 박헌영도 벽돌공장에 숨어 있었는데, 몽양만 유일하게 독립운동비밀조직을 만들어 건국준비를 해요. 건준을 전국 시군에 조직하지요.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너무 아쉽기 때문에 그때 도산이 살아 있었으면 하는 가정을 해보게 됩니다. 도산이 함께 있으면 그건 중도좌우가 합치는 거거든요. 도산은 미국을 기반으로 한 독립운동가예요. 도산이 있었으면 이승만이 그렇게 역할할 수가 없어요. 도산과 몽양이 함께 건준 사업을 했으면 어땠을까? 몽양과 도산은 조만식하고도 그렇게 가까웠어요.
  몽양은 폭이 넓었어요. 좌우합작운동하면서 좌우로부터 열두 번 테러를 당했어요. 맨마지막엔 우익한테 당했지요. 그 분은 우리가 미소 양국에 의해 분할 점령됐을 때 미국과 소련을 배경으로 하는 정치권력을 만들면 전쟁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봤어요. 신탁통치를 받지만 우리는 그 내부에서 좌우합작, 통일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주장이에요. 미소 정치권력을 배경으로 만들던 정치세력들로부터 욕을 먹었고, 좌우 양쪽에서 다 테러를 당했어요. 일본놈이 그렇게 죽이려는 사람을 우리가 죽인 겁니다. 지금은 달라졌냐. 김대중 대통령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철저한 인식 속에서 국정운영을 했다고 했잖아요.  
  몽양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균형된 시각으로 좌우를 다 아울러서 통합된 좌우합작 정부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죠. 연방을 실현하려고 했던 겁니다. 어떻게 보면 좌우연합을 만들려 했던 거예요. 지금은 그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독립운동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하나도 이상한 거 없었어요. 통일전선운동을 얼마나 여러 번 했습니까? 미소가 분할점령 하는 속에서 자기들 중심으로 미국, 소련에 충성하는 정부를 만들려는 흑심, 이기심 때문에 전쟁으로 가버린 겁니다. 그걸 제어할 힘이 없어진 거지요. 그런 게 몽양에 대한 우리들의 새로운 인식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일단은 지금 단계에서는 몽양보다도 더 낮은 수준으로 목표를 잡아야 할 거예요. 그게 평화공존이죠. 이걸 먼저 해야 돼요. 평화공존 이야기하면 남북분단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보는 사람은 자기 주장을 할 수는 있지만 남북간 평화협정, 평화공존을 거치지 않고 간다면 위험한 일이지요. 

몽양 여운형의 좌우합작 실현 노력을 잊지 말아야
남북은 먼저 평화공존에서 시작하자

정: 상임고문님 하면 동아투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에 따라 지금 ‘기레기’라고 불리는 언론의 현실도 생각하게 되는데요, 현재의 언론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지요. 그리고 지난 10월 24일에는 언론개혁을 촉구하는 3보1배를 하셨습니다. 이 운동의 의의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지요.
 
이: 동아일보에서 우리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한 게 올해로 45주년이 돼요. 그때도 우리가 정말 죄인 같은 심정으로 했어요. 72년 10·17유신선언 후 국민투표를 할 때 유신 찬양기사가 쏟아져 나오는데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때 서울대학생들이 동아일보에 와서 유신찬양하는 기자들 각성하라고 외쳤어요. 신문사 3층에서 내려다 보는데 정말 괴롭더라고요. 74년에는 민청학련사건 인혁당 사건 등 엄청난 일이 벌어졌어요. 재판정에서 사형, 무기, 20년 등 줄줄이 언도되는데 김병곤은 사형을 받고도 영광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걸 보도를 못하니 우리가 어땠겠어요? 자유언론실천선언 할 때 유신을 이겨내서 언론자유를 계속 하냐, 아니면 우리도 쫓겨나고 감옥에 가느냐 양단간에 결단을 하면서 한 거예요. 얼마 있으니 동아일보 광고가 다 끊어졌어요. 그런 속에서 동아일보에서 우리를 내쫓는 작업이 진행돼요. 그래서 1975년 3월 17일 그때 동아일보에서 언론자유운동 했던 사람들을 깡패를 동원해서 축출합니다. 
  쫓겨난 뒤 감옥에 갔다가 출소 후 그때를 되돌아보면서 복기를 해보니, 75년이 박정희가 궁지에 몰린 시기예요. 민청학련 사건으로 2-300명을 감옥에 넣었어요. 인혁당도 가둬놓고 장준하 선생은 유신헌법개정청원운동 한다고 감옥에 가뒀어요. 대학교수, 종교인 다 붙잡아놓고 지가 어떻게 하겠어요? 전국에서는 학생들이 일어나고 야단인데. 그때 월남전 마지막 협상이 벌어질 때입니다. 파리에서 미국 대표 키신저와 월남 대표 레둑토가 75년 초에 월남전 종전협상을 해요, 미국이 언제 월남에서 빠져나가느냐, 티우정권이 언제 끝나느냐의 문제거든요. 그때만 해도 중국이 파리협상을 파리에서 안 하고 북경에서 한 이유가 있어요. 하나는, 월남전 종전하려면 중국이 오케이해야 해요. 중국이 제일 깊이 개입했으니까요. 그땐 이미 미중 사이에 국교수립을 위한 협상이 시작될 때예요. 72년에 닉슨하고 키신저가 모택동을 만나요. 그런데 세계 언론이 거기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비밀이 보장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마지막 미월 종전협상을 북경에서 한 거예요. 
  그런데 키신저가 북경에 갔다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서울을 몰래 다녀갔어요. 그게 1월 13일, 14일, 15일쯤인데 보도가 안 되니 정확히는 몰라요. 미국 입장에서는 베트남을 포기하면서 한국도 포기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불식시키기 위해 박정희로 하여금 베트남의 패망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했죠, 말하자면 미국이 박정희에게 장땡을 주고 간 거예요. 월남 철군 일정을 박정희에게 통보했어요. 한국은 월남처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고 약속도 했지요. 그러니 박정희는 월남이 망한 걸 유신을 다시 복구하고 위기를 벗어나는 시기로 이용했지요. 2월 16일에 민청학련 사건에서 유인태, 김효순, 이현배, 인혁당 사람들 빼고 다 석방해요. 김지하까지도 석방하죠. 자기의 정치적 부담을 다 털어버린 겁니다. 4월 1일부터 월남이 뒤집힌 거예요. 4월 1일부터 31일까지 미군이 철군을 하고, 월남 정부는 망합니다. 4월 8일 박정희가 테러를 감행한 게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8명을 사형시킨 겁니다. 또 3월 17일 동아일보에서 우리들을 다 내쫓은 겁니다. 그건 뭐냐. 월남에서 미국이 손 뗀다는 것을 가지고 반민주탄압을 한 거죠. 
  석방되어 쭉 보니 마치 미국이 박정희 도와준 것 같더라구요. 그런 한을 안고 동아일보에서 내쫓기고, 조선일보에서 32명이 내쫓기고, 그것이 동아투위, 조선투위의 시발이지요. 그 이래로 우리는 동아조선의 친일, 친독재 부역으로부터 소외를 당했어요. 한국언론의 비애는 두 신문이 친일, 친독재 부역을 했다는 겁니다. 그게 조선 동아의 디엔에이예요. 그들과 45년째 싸우고 있는 거지요. 정치권력 밑에 검찰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조선동아는 사기업인데 정치권력이 아닌 기업논리로 움직이면서 독재와 친일의 디엔에이를 가지고 있어요. 한국사회는 정권은 바뀌는데 조선동아는 안 바뀌잖아요. 한국 사회의 방향을 자기들이 틀어버리는 거죠. 한국사회보다 자기들이 더 뿌리가 깊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권력도 자기들이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사회 모든 것보다 상위에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그래왔죠, 이제는 그걸 끝낼 때가 된 겁니다. 청산의 시기가 온 거죠. 
  조선동아 청산 이야기를 하면서도 동아조선의 해직언론들이 삼보일배를 한 까닭은 우리가 쫓겨나서 45년이나 됐는데도 우리가 언론자유운동을 잘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아직도 조선동아가 패악을 계속 하고 있으니 말이죠. 조선동아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들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심정으로 삼보일배를 하는 겁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고통받으면서 언론자유 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하는 거죠. 그런 이유로 7, 80 넘은 사람들이 삼보일배를 하기로 한 거예요. 우리가 무슨 쫓겨나서 고생하는 것을 벼슬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스스로 잘못했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국민들에 사과하는 뜻도 있어요. 

한국언론의 비애-조선 동아의 친일, 친독재 부역
한국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독선을 청산할 때가 왔어

정: 10월 12일 서초동에서 한 촛불집회에서 발언을 하셨는데, 상임고문님이 거기 가신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사실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검찰개혁촉구 촛불집회가 여의도로 옮겨지고, 서초동에서 그대로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두 집회를 모두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요. 앞에서 현 정권이 지지세력마저 분열시켰다고 하셨는데요, 이러한 분열상을 어떻게 보시는지 그리고 그 집회를 택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이: 거기를 가게 된 것은 내가 가겠다고 한 게 아니에요. 주최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거기 나와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내가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나같이 나이 많은 사람이 하는 게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고 하면서 고사했어요. 시사타파 사람들이 주최한다고 그러데요. 그런데 또 요청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나가게 되면 7-80년대 중앙정보부, 보안사, 남영동 끌려다녔고, 끝나면 검찰조사 받은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죠. 검찰이 얼마나 정권의 하수인이었는지를 말하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런 이야기 하면 된다는 거예요. 거기 가서 한 이야기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 조국 장관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 했어요. 검찰개혁은 친일검찰, 독재주구검찰 디엔에이를 거둬내라는 거라고 했죠. 윤석열 총장에게도 검찰개혁은 어떤 한 사건 수사를 얼마나 잘 하느냐고 아니고, 친일독재주구 대엔에이를 거둬 내는 거라고 그 임무를 다해야 한다고 했죠. 그랬더니 댓글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 조국 장관에 대해 왜 한마디도 안했냐, 그럼 여기를 뭐하러 왔냐, 아 그러면서 별의별 소리를 다 해요. 나는 그저 검찰폐해를 거둬내는 게 검찰개혁이지 문재인과 조국을 앞장세우는 게 검찰개혁이 아니라고 했을 뿐인데요. 물론 좋은 이야기 들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어요. 

검찰개혁 본질은 
친일검찰, 독재주구검찰 디엔에이 거둬내는 것

정: 저도 가서 들었습니다만 대다수 청중은 상임고문님 말씀을 경청하였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그런 이의를 제기하겠지요. 원래 그 집회가 그렇게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다수는 특별히 그런 문제제기 안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수가 시끄러운 거지요. 이제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상임고문으로서 주권자전국회의에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 주권자전국회의는 1987년 이전부터 앞장서서 싸운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잡혀가고 고문당하고 죽고 하면서 싸웠기 때문에 그래도 오늘이 있는 거지요. 다만 그런 과정에서 벽이 있어요. 우리가 설득할 수 있는 사람들인데도 벽이 있고, 그 벽을 허무는 역할을 나 같은 사람이 하는 겁니다. 아베와 이야기할 때 우리도 한 목소리로 해야지 않겠어요? 진보 보수 따로 할 수는 없잖아요. 그걸 한 목소리로 만드는 노력도 이제는 해야지요. 그렇게 할 때 영향력이 크지요. 그래서 다른백년, 그런 걸 통해서 프레임을 만들어야 해요. 민주화운동한 사람들, 평화통일운동한 사람들이 만들어야 하는데 그날 그날 하는 일에 쫓기다 보니 프레임을 다른 쪽에 맡겨둔 셈이에요. 다른 단체라든지, 외국에서 공부 좀 했다는 사람들이 하고 있지요. 물론 공부 좀 한 사람들이 여기 와서 함께 하는 것은 좋지만 프레임을 주도해서 만드는 건 여기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을 유념했으면 좋겠어요.

정: 긴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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