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은 진보세력과 ‘적폐청산열풍’을 폄하하고 태극기 부대에 관대했다
최장집은 진보세력과 ‘적폐청산열풍’을 폄하하고 태극기 부대에 관대했다
  • 최자영(전 부산외국어대 교수)
  • 승인 2019.12.11 09: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장집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은 한국진보의 도덕적, 정신적 파탄이라며 진보 세력을 맹비난하고 나섰다. 이런 비난은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19주년 기념식 및 학술회의'에서 한 기조강연, ‘한국민주주의의 공고화, 위기, 새 정치질서를 위한 대안에서 나온 것이란다.

최장집은 민주주의의 가장 위험한 적대자는 스스로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하면서 투쟁한다고 확신하는 이들이라고 한다. 나아가 이 민주주의에 위험한 이들을 짐짓 현 집권 세력인 것으로 연결하고, 이들이 민주화 이전으로 회귀해 역사와 대결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근본 원인이라고 했단다. 적폐 청산 열풍민주화 이전의 민주주의관으로 회귀한 것이라고 폄하했다.

최창집 고려대 명예교수
최창집 고려대 명예교수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한 최장집의 부정적 평가는 몇 가지 전제를 깔고 있는데, 그 전제가 피상적이고 편파적인 데가 있다. 또 그는 광화문, 서초동 등에서 벌어지는 상충하는 취지의 민중 시위가 빚어내는 질곡의 근본적 원인이 진보세력의 잘못된 민주주의관에 있다고 하는 그의 평가는 위정자들의 권력농단에 대해 완전히 면죄부를 주는 효과를 빚는다. 경찰, 검찰, 법원이 양산하는 권력농단의 적폐, 할 일 안하고 개기는 국회에 대한 제도적 개혁의 필요성을 완전히 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장집은 광화문 서초동 시위가 빚는 질곡의 원인이 원천적으로 진보세력에 있다고 하고, 그와 취지를 달리하는 태극기부대의 책임은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한편에서 진보 운동권이 민주화 이전으로 회귀해 역사와 대결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보고 있으니, 그 반대편에 진보세력이 아닌 태극기부대는 적어도 그런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에 다름 아니다.

바로 이 점, 태극기부대의 입장에 대한 분석의 결여가 최장집의 민주주의론을 허황한 것으로 만드는 데 치명적인 역할을 한다. 최장집의 주장과는 반대로, 진보 민중 세력이 아니라 광화문에 모이는 태극기 부대가 민주화 이전의 민주주의관으로 회귀하려 하고 있다는 점을 최장집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태극기 부대가 광화문에 모이고 미국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까지 들고 배회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집중된 권력을 탐하기 때문이며, 집중된 권력 구조 자체가 비민주적, 전근대적이라는 점 말이다. 문재인이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면 그를 빨갱이로 몰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민중의 동력을 폄하하고 집중된 권력과 위정자의 통치권력을 정당화하는 데서 출발하는 최장집의 민주주의론은 알게 모르게 광화문 태극기부대의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 최장집의 전도된 가치관은 권력집중의 구조하에서 위정자가 지배하는 정치체제 이외에는 양해하고 있는 것이 없음을 반증한다. 그에게는 집중된 권력 자체가 비민주적 농단의 주요원인이 된다는 상식, 촛불혁명은 권력을 농단한 위정자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사실, 그래서 권력은 풀뿌리 민주주의로 끝없이 분산되어야 한다는 개념 자체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최장집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국정 농단이 비민주적 집권의 권력구조와 관련된다는 점을 깡그리 무시했다.

최장집은 1987년 제도적 민주화를 이룬 뒤 김영삼(YS)김대중(DJ) 두 전직 대통령을 거치면서는 민주주의가 공고하게 다져졌다고 본 것이다. 말하자면, 1987년 이후에 민주화가 공고하게 다져졌는데, 현 정부 들어서서 1987년 이전의 전제주의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최장집은 노무현 정부를 언급하지 않았다. 동시에 이명박 박근혜 정부도 간화함으로써, 논리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현 정부는 이명박근혜 정부의 비민주적 국정 운영에 반발한 민중 촛불혁명의 결과물이다. 1987년 이후 제도적 민주화가 공고해졌다는 최장집의 선언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 공권력을 농단한 비민주적 위정자의 작태에 분노한 민중의 촛불혁명이 있었던 사실을 최장집은 깡그리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장집 자신은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이해하고 가치나 이상을 추구하기보다 현실 속에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정부 형태로서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이나 결과에서 여전히 비민주적 전통이 집요하게 들러붙어 망령처럼 떠나지 않고 수시로 구체화하고 있음을 최장집은 애써 지우려하고 있다. 상식을 전도한 최장집의 민주주의론은 그가 말한 현실이 아니라 오히려 자다가 느닷없이 내뱉는 잠꼬대 같다.

 

최장집은 민중의 운동'제도 밖'의 것으로 폄하하고 민주주의를 통치론으로 이해했다

최장집은 조국 사태당시 광화문과 서초동에서 있었던 조국 찬반 집회를 폄하하고, 그 대신 법원 판결의 권위를 내세웠다. 각기 다른 취지의 광화문과 서초동에서 있었던 조국 찬반 집회는 종교전쟁과 같아서, 이 같은 격렬한 정치갈등을 넘어서는 공정한 사법적 결정이 불가능하며, 법원 판결이 내려져도 어느 한 쪽이 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갈등이 심화되었다고 한다. 이런 평가는 최장집이 민주주의가 법원의 판결에 승복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보고 있음을 반증한다.

민중이 아니라 위정자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최장집의 민주주의론은 YS 3당 합당, DJP 연합, 이명박 정부에 대한 평가에서 더 명확해진다. 이 세 정부에 대한 최장집의 긍정적인 평가가 피상적이다. 최장집은 민주주의 위기의 시작은 이명박 정부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1987년 이후 민주주의의 기초가 공고하게 다져졌다고 보는 최장집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 YS 3당 합당과 ‘DJP 연합이다. YS 3당 합당에 대해서는 민주화 운동론을 민주적 통치론으로 대체했다고 했다. DJP 연합은 단순한 정치연합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한다. 군부독재의 원조(김종필 전 국무총리)와의 합작은 “DJ는 과거 갈등을 되풀이하는 게 더 큰 갈등을 불러들이는 것 말고 얻을 게 없다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꿰뚫어 봤기때문이라는 것이다. 햇볕정책 추진, 금융위기노동문제한일관계 등 각종 현안을 풀어나가는 데 연합으로 인한 넓은 정치적 기반의 역할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명박이 정부가 앞선 진보적 두 정부(김영삼ㆍ김대중 정부)의 기본 정책들을 전면적으로 뒤엎는 정책을 폈을 뿐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간 검찰수사가 패자(敗者)의 존립 자체를 위협했기 때문이란다. 그러자 진보파들은 제도권 밖 시민사회를 조직동원하는데 사활을 걸었고, 문성근의 100만 민란운동 등 좌파 포퓰리즘 운동이 분출됐다. 이러한 흐름이 문재인 정부를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여기서 최장집은 시민사회를 제도권 밖의 세력으로 폄하하고 또 문성근의 100민중운동을 민란’, ‘좌파 포퓰리즘 운동으로 매도했다. 이 때 시민은 주권자로서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 밖의 존재에 불과한 것이 되고, 대의 여하를 막론하고 민중운동은 그 자체로서 좌파 포퓰리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의 가치도 당연히 폄하된다. 최장집은 시민을 ''제도 밖'으로 축출함으로써,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의 취지를 여지없이 짓밟아버렸다.

그 대신 최장집이 가치를 두는 것은 위정자들이 구사하는 정책이다. 이명박 정부의 실패는 앞선 두 정부, 그것도 노무현의 정책은 빠지고, 그에 앞선 김영삼, 김대중 두 정부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뒤엎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최장집의 견해에는 정책의 변화가 있을 뿐, 권력의 비민주적 농단에 대한 언급은 생략되고 있다. 그와 함께 집권자 권력의 오남용에 대한 주권자 민중이 감시하고 처벌하는 기능과 그 절차에 대한 개념이 원천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최장집의 선악이원론에는 집중된 권력구조 자체가 비민주적 권력농단의 원인이 된다는 인식이 없다.

최장집은 운동론적 민주주의관을 선악 이원론에 근거한 것으로 잘못 이해했다. 군부 독재라는 절대악이 분명했던 과거 경험에 의해 민주주의 이념이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선과 악 등의 대립 항을 통해 이해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최장집은 한국 민주화의 특성에 대해 자유주의적헌법주의적 전통이 약한 대신 인민민주주의적 민주주의관이 강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런 다음, 현재 진보세력이 언급하는 직접 민주주의가 전체주의와 유사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단다. 이어서 그는 직접민주주의가 다원적 통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가 누락된 상태이며, ’모든 인민을 다수 인민의 총의에 복종하도록 강제하는 전체주의와 동일한 정치체제인 것으로 정의했다.

최장집은 직접민주주의다양성이 결여된 전체주의에 유사한 것으로 잘못 이해한 것은 직접민주정이 권력구조의 분산에 기초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또 그는 자유주의적헌법주의적 전통인민민주주의'민주주의관과 대조되는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양자를 다 무시한 무지막지한 집권의 독재가 100여년을 관통하여 흘러온 한국 역사의 현실을 무시, 왜곡하고 있다.

권력구조에 대한 그의 무지는 독일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1888~1985)의 정치이론을 인용할 때 더 명백해진다. 최장집에 따르면, "진보 대 보수, 개혁 대 수구 등 확실한 구분과 치열한 투쟁, 권력 쟁취의 지향성이 칼 슈미트의 정치이론과 깊숙이 접맥된다고 한다. 칼 슈미트는 전체주의적 국가정치관으로 나치 집권의 중요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것으로 악명이 높은 학자라고 한다.

그런데 최장집은 칼 슈미트의 이론을 진보 대 보수등의 맥락에서 피상적으로 언급할 뿐, 그 이론이 권력구조적으로 어떤 맥락에 있는가를 적중하게 지적하지 못했다. 칼 슈미트의 이론은 바로 비효율적인 의회 대신 행정권력에 의한 효율성을 지향하려 했다는 점 말이다. 칼 슈미트에 대한 최장집의 피상적 언급은 주권자로서의 민중의 권위를 지향하는 직접민주정치가 행정권력의 위정자를 대신하는 풀뿌리 민주정치를 지향하는 것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진보 운동권에도 여전히 대의제 국회와 집중된 행정권력 지향성을 가진 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직접민주정치는 풀뿌리 분권에 입각해있기 때문이다.

최장집은 청와대가 앞장선 2018년 헌법개정 시도를 운동론적 민주주의관의 결과물인 것으로 비판했단다. 그는 국회가 아니라 청와대 민정수석이 개헌안을 발표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다고 부연했다고 한다.

당연히 해야할 개헌 논의를 국회에서 미적거리고 결국 도외시 한 상황에 대해 최장집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최종 시한을 두고 경고를 해도, 시민단체가 국회 앞에서 시위를 하고 급기야 원포인트 (국민발안제도 한 가지만)’ 개헌을 요구해도 국회는 마이동풍 잠잠했다. 국회는 한 마음이 되어 귀를 막았는데 여기에 여당 야당이 따로 없었다.

 

시민단체 혹은 학계가 정치를 하면 안 된다는 그릇된 사양의 미덕

최장집은 또 "위기의 중심에는 시민사회도 있다"며 시민단체도 비판했단다. "(2016) 촛불집회 이후 전면적으로 정치화하며 변질됐다""국가로부터의 자율성이 본질이지만, 국가권력에 의해 동원돼 국가의 지지 기반 창출에 보조적 역할을 하는 게 오늘날의 시민사회"라고 비난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최장집의 지적에 대해 토론자들은 시민단체들이 정치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도 봐야 한다”(김선욱 청암재단 이사장), “정치화되고 갈라진 건 사실이지만 (정권에 의해) 완전히 동원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임현진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등 반론도 나왔다고 한다. 이런 토론에서는 최장집이나 시민단체의 지적이 모두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 시민단체가 정치를 하면 안 된다는 잘못된 사고방식이 그것이다.

시민단체는 그 자체로서 정치화되어야 한다. 시민단체가 정치를 하면 안 된다는 그 사양의 도덕이 오늘날 한국 위정자들의 권력 오남용을 이렇듯 부추겼다. 모든 권력의 주권자인 시민은 그 자체로서 정치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차제에 대학 교수나 학계의 연구자들도 연구 교육과 정치가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학계와 현실은 너무나 단절되어서 아까운 학계의 지식이 상아탑에만 머물 뿐, 현실의 부조리를 개혁하는 데 큰 보탬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그릇된 사양의 미덕때문이다. 시민단체도 학자들도 모두 멀찌감치 정치계에서 떨어져 있으니, 위정자들의 오만과 월권이 천정부지가 되었다. 나라 정치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이 같은 그릇된 봉건적 사양의 미덕 때문이다. 시민단체, 학자에게 정치를 금기로 여기게 하는 '사양의 미덕' 자체가 뜻있는 시민의 정치 참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봉건적 전제주의 음모일 뿐, 시민운동가, 학자이기 이전에 모든 이가 주권자로서의 시민이다.

 

직접민주정이 분권이 아니라 집중된 권력구조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

최장집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민주(民主)’가 뜻하는 민중의 주권이 아니라 그 반대쪽 위정자의 통치권력의 정당화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민주주의론 자체가 원천적으로 비민주적이라는 점을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 그는 지금 광범하게 확산되고 있는 풀뿌리 분권, 민회운동에 귀막고 있고, 오직 전근대적 권력집중, 위정자에 의한 통치론만이 그의 머리 속을 채우고 있다. 전근대적, 전제주의적 정치권력 구조의 망령을 탈피하지 못한 최장집의 민주주의론은 그 자체가 구태의연한 현학자에 불과하다는 점을 스스로 증명했다. 그것은 지금 깨시민(깨어있는 시민) 민중이 주도하는 풀뿌리 직접민주정치를 거스르고, 권력집중의 상태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태극기부대와 맥락을 같이 한다.

최장집이 현실을 전도한 논리를 버젓이 전개한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이해가 그 한 사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많은 한국인의 이해와 공감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직접민주정이 분권이 아니라 집중된 권력구조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 사실 풀뿌리 분권에 대한 인식의 결여는 한국 근현대사의 여정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조선조 봉건왕정을 이어서 일제 식민지, 이승만 독재, 박정희 유신독재, 그 뒤를 잇는 군부정권 등의 기나긴 중앙집권의 역사는 한국인을 핏속까지 권력에 대한 순응의 도덕으로 길들여왔다. 이제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도로보낼 것이 아니다. 각 지역에서 고유한 행정과 문화를 진작하고 서울도 하나의 지역에 불과하며, 각 지역의 연방의회는 모두에게 공평한 거리에 있는 중간지역으로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