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조커 그리고 조국
기생충, 조커 그리고 조국
  • 최한욱
  • 승인 2019.12.18 1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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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욱의 영화로 보는 세상

*경고*
이 글은 분노를 유발할만큼 극악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든 상업영화는 사회적 잠재의식을 반영한다. 사회적 잠재의식을 반영하지 않는 상업영화는 제작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 경제적 재앙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블록버스터영화는 비정치적이라고 믿기 쉽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대중의 사회적 잠재의식을 효과적으로 반영하는 영화만이 비로소 대량소비되기 때문이다.

1천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한국 영화들은 대부분 직접적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표출한다.(한국의 대규모 상업영화들이 이른바 ‘국뽕’ 논란에 휩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국가에서 민족주의 혹은 애국주의는 가장 발화력이 높은 사회적 잠재의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은 제작자는 예술가이거나 바보다) 

이는 할리우드영화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가장 비정치적인 장르로 여겨지는 슈퍼히어로영화조차 점점 정치화되고 있다. 미국의 민권운동사를 직접적으로 인용한 <블랙 팬서>가 비평 뿐 만 아니라 흥행에서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우주최강의 악당 타노스*(검색 참조)가 멜서스주의자*(검색 참조)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멜서스주의자는 박정희였다)

때문에 만약 영화로 돈을 벌고 싶다면 예술보다 정치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정치적으로 명민한 영화가 대중의 선택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살인의 정치경제학

그런 의미에서 올해 칸과 베니스가 최고의 작품으로 선택한 두 작품, <기생충>과 <조커>는 매우 흥미롭다. 일견 공통점을 발견하기 어려운 작품처럼 보이지만 두 작품은 마치 이란성 쌍둥이와도 같다. 

두 작품은 계급갈등이라는 진부한 소재를 상업영화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극단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생충>에서 기택(송강호)은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소박한(?) 계급투쟁의 처연한 종지부를 찍는다.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던 찌질한 낙오자 아서 플렉(조커)이 선택한 최종적 해결책도 결국 살인이다.

이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정한 생존투쟁의 패배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살인(혹은 자살) 뿐이라는 냉혹한 진실의 예술적 증언이다.

두 작품 모두 평단과 대중의 열렬한 지지(혹은 비난)을 받는 것은 계급갈등이라는 진부한 소재를 살인이라는 참신한(?) 방식으로 해결하는 두 영화가 현대 자본주의를 읽는 대중의 눈높이와 대체로 일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현대 자본주의가 극단적 폭력 외에 다른 출로가 없을만큼 타락했다는 대중의 인식, 즉 사회적 잠재의식의 반영이다.

우리가 조커의 각성을 통해 불편한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게 되는 건 서사와 사회의 맥락이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조커를 잉태하기 충분한 사회적 개연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커를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따라서 조커를 연민하는 자신의 정신건강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진정한 비극은 극단적인 폭력조차 계급의 유리벽을 허물 수 없다는 참담한 진실에 있다. 기택은 박사장을 살해한 이후 반지하에서 지하벙커로 추락하고, 아서는 조커라는 미치광이 악당으로 거듭 날 뿐이다. 극단적인 해결책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강 혹은 추락의 쾌감 뿐이다.(조커가 각성 이후 춤을 추며 계단을 내려오는 명장면은 추락의 쾌감을 소름끼치도록 찬란하게 묘사했다) 이것이 두 작품의 탁월한 예술적 통찰력이다.

두 편의 영화는 마치 임박한 파국의 전조와도 같다. 우리는 곧 도래하게 될 정치경제적 파국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어린아이처럼 새근새근 단잠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올해 칸과 베니스의 선택은 임박한 위기에 대한 예술적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조국수호 혹은 조국수호

그런데 여기서 조국이 왜 나오냐고?(‘관종’의 ‘어그로’는 아니니 걱정 마시라) 

조국사태의 사상적 기초는 <기생충>, <조커>와 마찬가지로 계급적 분노다. 불평등, 불공정한 계급사회에 대한 대중(특히 20대 남성)의 분노가 조커의 총구처럼 조국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서 플렉의 각성, 즉 조커의 탄생에 불편하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조국에 대한 대중의 분노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문제는 (마치 조커의 각성처럼) 총구의 방향이 완전히 잘못됐다는 것이다. 조국을 저격한다고 계급의 장벽이 허물어지기는 커녕 더욱 견고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조커의 등장이 배트맨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처럼 조국혐오는 아버지(혹은 어머니)를 잃은 ‘어둠의 기사’들에게 복수의 기회를 줄 뿐이다. 조커식의 극단적인 해결책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추락의 쾌감 뿐이다.

사회역사적 맥락에서 조국사태는 드레퓌스사건*(검색 참조)을 연상시킨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간첩이 된 드레퓌스의 석방을 위해 당시 프랑스의 좌파진영이 총결집한 것은 단지 드레퓌스에 대한 연민 때문만은 아니다. 보수파(혹은 왕당파)의 격렬한 저항도 간첩행위에 대한 단죄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이후 도래하게 될 파국적 정치국면의 징후적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프랑스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격돌하였고 드레퓌스내전의 승리로 프랑스는 가까스로 공화정을 지켜낼 수 있었다.

조국은 나쁜 놈일까? 그의 혐의는 모두 사실일까? 그는 장관직을 수행할 수 없을만큼 파렴치한 인간일까? 단언컨대 드레퓌스가 간첩이 아니었던 것처럼 조국의 혐의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표창장 위조는 그저 제2의 ‘논두렁 시계’일 뿐이다. 

계급투쟁의 에너지를 혐오로 치환해 교묘하게 활용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고전적 수법이다. 나치가 계급적 분노를 유대인혐오로 교묘하게 치환해 권력을 탈취한 것처럼 한국의 기득권카르텔은 조국혐오를 이용해 권력을 탈환하려는 것뿐이다. 이것이 조국사태의 본질이다.

진중권류의 영혼없는 평론가들이 제 아무리 재잘거려도 조국대전은 이미 징후적 사건으로 전환되었다. 이제 구호는 ‘조국(曺國)수호’가 아니라 ‘조국(祖國)수호’다. 10·5서초대첩에 등장한 대량의 태극기는 이러한 국면의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조국(曺國)이 아니라 조국(祖國), 즉 공화국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 싸움에 결말은 어떻게 될까? 드레퓌스사건이 그랬던 것처럼 결국 진실이 ‘조국’을 자유케 할 것이다. 진실의 전모가 드러나면 기득권카르텔은 자신들이 조커가 아니라 하비 덴트*(검색 참조)를 창조했다는 끔찍한(?) 사실 앞에 경악하게 될 것이다.(한편에서는 저주의 굿판에 추임새 넣던 얼치기 평론가들이 언제나 그랬듯이 전광석화와 같은 태세전환의 기술을 시연할 것이다) 

그리고 하비 덴트가 고담시에 평화를 가져올지 아니면 투페이스로 타락하게 될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빌런의 등장이 히어로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처럼 조국사태는 또 다른 영웅의 탄생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 영웅은 이미 수백만의 촛불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고담시를 구원할 영웅은 다크나이트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다.

* 이 글은 주권자전국회의 회보 <주권자> 8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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