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과 안철수의 도덕론 - 시민 좀비는 일부 정치가의 부도덕성이 아니라 위정자의 집중된 권력에서 나온다
진중권과 안철수의 도덕론 - 시민 좀비는 일부 정치가의 부도덕성이 아니라 위정자의 집중된 권력에서 나온다
  • 최자영(전 부산외국어대 교수)
  • 승인 2020.02.13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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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학자 진중권은 정치를 잘 모른다,

진중권과 안철수의 만남 

지난 29일 안철수 전 의원의 국민당 창당발기인 대회가 있었고 안 의원이 창당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날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무너진 정의와 공정의 회복이란 제목의 강연을 했다. 중앙일보에서는 논평에서 진중권과 안철수 두 사람의 공통점을 찾자면 더불어민주당·자유한국당으로 대변되는 낡은 정치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하고 이날도 진중권이 집권세력을 질타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여기서 낡은 정치라는 개념은 모호하다. 필자가 보기에 두 사람의 공통점은 오히려 도덕성에 판단의 근거를 둔 점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안철수 국민당 창당준비 위원장이 진중권씨(전 동양대 교수)와 인사하며 악수를 하고 있다.
안철수 국민당 창당준비 위원장이 진중권씨(전 동양대 교수)와 인사하며 악수를 하고 있다.

 

진중권은 그 발표에서 조국 전 장관의 도덕성을 두고 비난했다. 언론매체에 보도된 내용을 대충 간추리면, “조국 사태는 제게 트라우마다. 내가 믿었던 사람들과 가치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청문회 나와서 나는 사회주의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라고 할 땐 끝까지 말하지 못하고 울먹였고, 청중의 격려 박수에 1분여 뒤 고개를 든 그는 어떻게 그렇게 살고 사회주의자를 자처할 수 있느냐. 이념에 대한 모독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시인 안도현, 소설가 공지영씨 등에 대해서는 그들은 대중의 이성·윤리의식을 믿지 않는다. (대종이) 선동·조작당할 수 있는 존재로 본다고 말했단다. 현 정권의 가장 큰 잘못으론 정의의 기준 자체를 바꿔버린 것을 꼽았다. 현 정권은 잘못만 하는 게 아니라 기준 자체를 바꿔버린다. 로고스(logos·이성)와 에토스(ethos·윤리)가 무너지고 정치가 (시민을) 이성이 없는 좀비로, 윤리 잃은 깡패로 만든다고 비판했다. 급기야 속물주의적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조국 전 장관이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것처럼 여권 핵심 인사들이 여전히 스스로를 운동가·혁명가로 생각하기에, 문제가 생기면 기준 탓을 한다고 했단다.

인물 도덕론에서 진중권과 안철수는 닮은 점이 있다

이날 안철수는 창당준비위원장 수락연설에서 대한민국 정치는 지금 세금 도둑질 바이러스 진영 정치 바이러스 국가주의 바이러스, 이 세 바이러스에 동시에 감염돼 있다투쟁하는 실용정치의 길을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각종 바이러스를 잡는 것실용정치는 서로 맞대응의 개념이 아니다. 세 가지 바이러스 개념에서도 진영정치와 국가주의 같은 개념 자체가 구체적으로 뜻하는 바가 모호하며, 또 각종 바이러스를 잡기 위해서는 왁신’(치료약)이 필요하고, 또 그 왁신은 바이러스 종류마다 달라지고 특정되는 것인데 비해, ‘실용의 개념은 이와는 다른 맥락에 있으며, 모호하고 광범하다. 보통 실용에 대비되는 개념은 비실용성의 이론, 현학적 진리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안철수가 말하는 실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게 될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현재로서 드러나는 한 가지 잣대는 진중권과 같은 맥락의 인물 자질론이다. 안철수는 진중권의 강연내용을 소개하면서 실수나 잘못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인정하는 용기와 솔직함 앞에서 진 교수가 진짜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했다고 평했다. 안철수에 따르면,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중요하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알기 때문에 민주주의 제도를 선택한 게 아니겠냐진정한 민주주의자라면 생각이 다르다고 미워할 이유가 없고, 오히려 똑같이 생각하는 게 더 위험하다고 여길 것이라고 했다. 안철수는 잘못, 용기, 솔직함 등의 개념에서 개인의 품성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있고, 이것도 일종의 도덕성이라고 하겠다.

시민 좀비를 양산하는 것은 부정직함이 아니라 위정자들에게 편재된 권력구조이다.

이 두 사람의 도덕성 논의는 제도나 구조적 문제보다 개인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두 사람이 조국을 비난할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은 물론 조국보다는 더 도덕적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조국보다 훨씬 더 열악한 욕심쟁이들은 아예 비난조차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더 악질이 물론 있겠지만, 조국 같이 자기 입으로 사회주의자라고 한 사람은 적어도 여하한 비도덕적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이겠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이 두 사람은 인간이 다 대동소이하다는 점을 터득하지 못한 것이다. 또 조국을 비난하면서 그와 유사한 비리의 주체가 된 누구누구는 수사도 하지 않은 검찰의 선택적 표적수사의 문제에 대한 인식은 찾아볼 수가 없다. 나아가 조국과 현 정권을 싸잡아 비난하는 데 골몰한 이들은 일제식민지, 각종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자행되어왔으며 여전히 곳곳에 건재한 인권의 침해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 하는 데 대한 구체적 대안을 적어도 현재까지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주권자 민중이 좀비로 전락하는 것은 여느 정치가의 개인적 품성의 잘잘못 여부, 정의의 기준, 이성(로고스), 윤리(에토스) 등의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권력구조의 불평등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권자 민중에게 발언권을 허용하지 않고 권력을 전횡하려는 위정자들의 유서 깊은 전통에 기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도 위정자들은 권력을 자신들 만의 게임으로 환원하려고 하고 있으며, 대통령의 권한을 국회로 가져오려는 내각책임제를 구상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국회에서는 유신독재 때 빼앗아간 국민개헌발안권조차 민중에게 돌려줄 생각을 추호도 없다. 여당, 1야당, 군소정당 가릴 것 없이 국회의원들이 꿀 먹은 벙어리같이 이 현안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음이 그런 사실을 반증한다. 그러고 보니 진중권이 정치가들의 도덕성에 목메는 것은 그가 정당정치 중심의 사고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이 정치에 참여하고 공직자를 감시 처벌하는 제도 속에서는 그 어떤 위정자나 공직자도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는 점에는 아직 착안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면 하릴없이 그들의 도덕성에 운명을 걸고 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사회문제는 인간성 일반이나 개인 도덕성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진중권은 자신이 비난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보다는 스스로를 더 도덕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그가 안철수의 국민당 창당발기인 대회에서 강연을 할 때, 조국 전 장관에 대한 실망을 표현하면서 감정이 북받쳐 말을 잇지 못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과 사회의 부조리를 두고 고민했던 거장들은, 진중권과는 사뭇 다르게, 인간을 개인적으로 매도하지 않았다. 또 인간성 자체를 개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겉으로 개조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는 위선일 뿐, 실제로 인간성은 그 선악의 여부와 무관하게 만고불변이다. 어느 개인이나 인간성을 두고 절망하는 대신 사상의 거장들은 보편적 원리 혹은 사회적 환경, 구조적 측면에서 해결책을 구하려 했다.

사랑과 용서의 원리에 기초하여 예수는 죄 있는 자와 죄 없는 자를 오십보 백보로 여겼다. 칼 마르크스는 탐욕한 인간의 재물욕이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생산수단의 공유를 설파했던 것이 그러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기원전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를 만나게 된다. 그는 희생과 탐욕의 양면성을 지닌 인간 보편의 인간성은 불변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 약 30년에 걸친 전쟁의 질곡을 보고서는 후세에 교훈을 남겨야 하겠다고 생각하여 긴 <역사>를 서술했다. 그것은 인간을 구별하여 비도덕적 인간을 매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양면의 인간성 가운데서 긍정적인 것을 조장하고 부정적인 탐욕은 억제하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해야 하겠다는 것이었고, 그 환경은 바로 전쟁이 아니라 평화였다. 전쟁이라는 상황이 모순된 인간성 가운데서 부정적인 면을 부추겨서 인간이 더욱 몰염치하고 잔학한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흔히들, 투키디데스는 국제관계에서 세력의 균형을 추구한 현실주의자인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나, 그것은 그가 서술한 <역사>의 진의를 왜곡한 것이다.

개인을 아무리 공격해봐야, 찢어서 능지처참을 하거나 아니면 1,000년 징역형을 선고한다 해도, 그런 것을 보고 겁을 낸 인간들이 자신의 인간성을 개조하거나, 더 나아가 사회구조적 비리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도덕성을 두고 공격하는 진중권의 치명적 약점이 여기에 있다. 주체가 누구인가, 혹은 그 비리의 정도의 다소를 막론하고, 일단 수면 위로 드러난 사회적 문제는 사회적 환경과 제도의 개선을 통해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조모씨 집안은 조사하고 왜 나모씨 집안 조사는 안 하느냐는 형평성의 문제, 또 검찰이 특정인을 선택적, 집중적으로 탈탈 터는 것이 정치적인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닌가라는 정치검찰의혹 같은 것도 대승적 차원에서 다소간 해결될 것이 아닌가 한다.

진중권이 한편으로 지지한 노동조합은 다른 한편으로 그가 지지한 의회의 대의제와 다르다

 진중권은 보수도 진보도 아닌 양비론자이다. 그의 양비론은 헌정을 파괴하는 쿠데타론에서 나타난다. 그는 한편으로 박정희에 의한 두 차례의 헌정 파괴, 즉 군부 쿠데타와 10월 유신을 파시즘의 소산으로 매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진영에 의한 좌익혁명도 헌정을 파괴하는 것으로 반대한다. 그래서 그는 헌법을 전복하려는 혁명적 실천은 이제 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우리 헌법의 진보성에 걸맞게 내려지는지 감시하는 법 비판의 실천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폭력과 상스러움, 42-43).

그런데 자유주의 체제를 좌우에서 위협하는 폭력을 제거한다고 해서 세상이 천국이 되는 것이 아니란다. 여기서 진중권은 두 개의 권력을 논한다. 그것은 국가의 폭력과 시장의 폭력이다. 그는 시장을 위해 노동조합을 해체하고 그 대신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하는 제도를 마련하자는 한 자유주의자의 제안에 반대하면서, 노동조합의 존재를 옹호한다. 노동조합은 수십 년의 한국 노동운동이 쟁취해낸 권리이며, 시장의 폭력에서 노동자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국가 못지않게 시장도 가공할 폭력을 행사하므로, 이 폭력에 맞서기 위해서 노조는 하나의 으로 존재해야 한다.

진중권은 노동조합의 저항에 정통해있다. 그에 따르면, 노동조합의 총파업은 국가라는 리바이어던과 마주 선 잠재적 메시아이다 노동조합은 탈신비화해야 하고, 의 행사가 맹목으로 흐르지 않도록 늘 감시하고 비판하며 그 정당성을 물어야 한다(폭력과 상스러움, 40).

이 때 노동조합은 국가 의회제도나 정당제도를 통해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그의 노동조합론이 국가와 시민 민중(국민) 간 관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후자의 경우 진중권은 대화의 장으로서 대의제 의회제도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처벌 기능에 대한 진중권의 양비론

진중권은 국가가 갖는 폭력의 기능에 대해서도 양비론을 택한다. 그는 사법제도 없이 사회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고 한다. 또 사회질서가 필요 없다고도 믿지 않는단다. 국가의 공적 폭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곧 모든 폭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도 않다고 그는 말한다. 오히려 사적 폭력을 국가에 의한 공적 폭력으로 바꾸어놓는 것이 적어도 역사의 특정 시점에서는 진보적이었던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이런 전제를 기본으로 깔고서, 그가 비판하는 것은 다만, 과거에는 폭력이었던 것이 제도로 바뀌었을 때에는 더 이상 폭력으로 느껴지지 않고, 그것이 폭력에 대한 우리의 감성을 무디게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뿐이라고 한다.

진중권은 자신의 유물론은 힘에 대한 비판, 폭력비판이 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성' 의 포장지로 을 감추는 근대 자유주의의 위선, ‘의 망치로 이성을 두들겨 패는 좌우익 탈근대의 악마성 등과 관련하여, 진중권 자신은 근대와 탈근대의 소모적 대립을 넘어서 폭력에 대한 비판을 지향한다는 것이다(폭력과 상스러움, 40).

여기서 그는 좌우의 파시즘을 모두 경계하고, 벌거벗은 의 원시적 충돌을 이성적 대화로 바꾸는 기제로서 의회주의를 옹호한다(폭력과 상스러움, 39). 여기서 진중권의 양비론이 다시 등장한다. , 노동조합의 권력을 국가에 반납하자는 고종석의 견해에 반대하면서, 프랑스의 공산주의자이며 혁명적 조합조의자인 조르쥬 소렐의 힘없는 대화는 공허하다를 원용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대화 없는 힘은 맹목이라는 점에서 소렐과 의견을 달리한다고 한다(폭력과 상스러움, 39).

여기서 진중권은 대화와 폭력을 서로 상대적 개념이 되는 것처럼 자의적으로 설정하고 있다. 하지만 폭력의 대비되는 개념은 비폭력일 뿐, 반드시 대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또 의회의 존재 의미를 권력구조적 측면에서 파악하지 않고 대화의 장인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그 대화의 주체가 누구이며 그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이 결핍되어 있다. 진중권이 현재 한국의 막장 국회를 보고도 그 의회제도가 이성적 대화가 가능한 장소로 보는 것이라면, 그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 국가의 처벌 기능을 무시하지 않지만 경계해야 한다는 그의 양비론은 두 가지 개념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그가 말하는 국가의 개념이 획일적이기 때문이다. 진중권이 말하는 국가란 사실 권력의 주체인 위정자들의 정부를 지칭하는 것 같고, 그것도 폭력을 획일적으로 행사하는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전제로 하는 듯하다. 그러나 국가란 정부의 위정자들 뿐 아니라 피지배자로서의 시민 민중을 아우르는 개념이 되어야 한다. 또한 국가의 처벌 기능은 위정자들의 정부와 피치자로서의 시민, 그 두 주체 간에 권력이 편재한 양상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지방 분권이나 풀뿌리 민주정치의 실현 정도에 따라서도 국가 폭력의 정도는 달라진다. 시민의 세력이 강할수록 공법보다 사법의 영역이 더 넓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국가(정부) 폭력의 기능을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그 크기의 다소와 무관하게 폭력의 존재 자체가 민중을 억압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 동시에 그 정부의 폭력을 제한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권력의 원천으로서의 주권자 민중의 능동적 저항에 의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시장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노동조합의 이 필요하듯이, 국가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민중은 스스로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중권은 전자는 인정하고, 후자는 대의제 의회제도를 통한 대화로 대체해버렸다. 투쟁이 아닌 대화! 그런 논리라면, 노동조합의 경우에도 고종석이 주장한 바와 같이 그 권력을 국가기관에 반납해야 하는 것 아닌가? 투쟁이 아닌 대화를 위해서. 그러나 진중권은 노동조합의 경우는 대화가 아니라 투쟁을 택했다. 아마 진중권은 노동자들의 처절함을 옆에서 직접 목도하면서 시장권력에 맞선 투쟁의 불가피함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터득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노동조합이 아닌 다른 사안에서는 대의제 의회를 통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본 것일까 하는 점은 의문이다.

진중권은 민주자유를 형식이 아닌 내용으로 잘못 이해했다

진중권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진중권은 자유를 시장 경제의 자유로 인식하고 이 자유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것으로서, 그가 생각한 민주와 대립하는 개념으로 이해했다.폭력과 상스러움, 97)

이 같은 시각에서 그는 존 롤스의 정의론을 두고 자유주의 이념의 틀에 평등이라는 이질적 요소를 받아들여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로 평가했다. ‘자유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 이해하고 있으니 자연히 자유가 평등과는 들어맞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롤스가 이질의 두 개념을 같이 접합하려고 무리하게 시도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

또 진중권은 “‘민주는 본질적으로 평등의 이념인 것으로 정의하고 나아가 그것을 경제적 평등, 공산주의와도 연결시킨다.  경제적 평등의 요구가 자유를 억누르면서 관철될 때, 공산주의라는 극단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진중권은 자유민주주의가 이질적인 자유와 민주가 극단을 피하기 위해서 합성된 단어인 것으로 이해했다.

여기서 진중권이 사용하는 자유와 민주의 개념은 특정한 시기와 장소에서 경향성을 가지고 사용되는 한정된 예에 적용되는 것일 뿐, 일반화할 수가 없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자유는 시장 경제가 아닌 정치적 개념으로도 사용되고 있고, 또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이전부터 유구한 역사를 가진 것이다. 정치적 개념으로 사용되는 자유는 자본주의와 무관하게 독재의 억압에 저항한다는 뜻이다.

민주의 개념도 단순히 민중이 중심이 된다는 절차, 형식을 말하는 것일 뿐, 그 자체로서 평등이나 불평등을 의미하는 용어가 아니다. 더구나 평등이 자유를 억누를 때 그 극단으로 공산주의가 성립한다.’는 논리도 성립하기 곤란하다. 이런 무리한 논의가 갖는 결정적 오류는 형식, 절차를 뜻하는 자유 및 민주의 용어를 내용 혹은 실질을 뜻하는 평등이나 공산주의와 같은 맥락으로 잘못 접합한 데서 비롯한다. 그런 관점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이질적인 자유와 민주의 극단을 피하기 위해서 합성된 단어라는 진중권의 해석은 완전히 초점을 벗어나 있다. 독재에 저항하는 자유는 반드시 민주와 상반되는 개념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중권이 존 롤스의 정의론에 대해 자유주의 이념의 틀에 평등이라는 이질적 요소를 받아들여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라고 평가한 것도 치명적인 실수이다. 존 롤스의 자유절차적 자유주의로서 개인의 자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뜻할 뿐, 평등이나 불평등, 혹은 공동체주의나 개인주의 등의 어느 한 편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롤스는 절차적 자유주의를 통해 평등을 지향하려 했을 뿐인 것이다.

사회주의연대성에 입각한 진중권의 제3의 공동체는 좌와 우, 혹은 거시와 미시 공동체를 초월한 새로운 길인가?

진중권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를 대립된 것으로 본다. 또 이 양자 간 대립은 공정과 선 간의, 그리고 합의와 계약 간의 대립과 통한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형식적 절차로서의 공정한 계약을 뜻하는 반면, 공동체주의는 형식적 절차 이외에도 공동선에 대한 합의를 포함한다고 한다(폭력과 상스러움, 122).

여기서 진중권은 공동선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에 따르면 공동선은 이중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때로 보수층들이 가진 주관적 가치, 기득권 층의 사적(私的) 가치관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와 반대로 반()자본주의적 경향의 좌파 공동체주의를 뜻하기도 한다.

나아가 진중권은 공동체주의에도 다양한 경향이 있음을 말한다. 우선 좌와 우의 구분이 있다. 우익 공동체주의는 영토를 공동체의 단위로 하여 사회적 통합력을 극대화하려는 구심력의 으로 정의한다. 반면, 좌익 공동체는 작은 모임을 단위로 하는 좌파의 유토피아적 무정부주의라고 하고, 사회적 통합을 점진적으로 거부하는 원심의 힘이라고 한다. 그 구체적인 예는 68년의 학생운동과 같은 유토피아적 코뮌’, 이진경의 공동체주의 같은 것이다. 그 외에도 좌우에 속하지 않는 탈근대적인 미시공동체가 있다. 생명, 환경 등에 관심을 갖는 생태공동체주의, 게이, 히피, 페미니즘 공동체 등이 그런 것이다.

그런데 진중권은 여기에서 또 다른 공동체 개념으로 제3의 길을 제시한다고 한다. 3의 길이란 근대적인 국가공동체와 탈근대적인 미시공동체의 대립 속에서 잊혀진 길로서, 사회적 책임과 연대라는 실질에 기초하는 것이란다. 또 그것은 애국심 같은 공허한 개념이 아니라 분배정의, 사회보장, 약자 및 소수자에 대한 보호 등의 실질에 기초한 사회연대의 통합을 뜻한다는 것이다. 진중권에 따르면, 허구적인 국가공동체 관념은 시민적 연대의 개념으로 바뀌어야 한다(폭력과 상스러움, 124).

여기서 진중권이 던지는 또 하나의 질문은 개인들 사이의 계약에 근거한 이익사회에서 어떻게 공동체적 요소를 확보할 것인가하는 것이다그에 따르면 학연, 지연, 혈연 같은 미크로(미시적) 공동체, 또 국가주의와 같은 마크로(거시적) 집단주의로부터 개인을 자유의 주체로 해방시켜야 한다. 그래서 개인들이 자유로운 소통망을 구성함으로써 자발적인 합의를 통해 국가주의라는 허구적 공동체를 사회주의연대성에 입각한 실질의 공동체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폭력과 상스러움, 99).

진중권은 미시적 공동체와 거시적 공동체의 개념을 싸잡아 개인을 주체로 한 해방자유로운 소통망을 통한 자발적 합의의 개념과 대조적인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후자를 사회주의연대성에 입각한 제3의 길로 정의하고 있다. 이 같은 진중권의 논의는 결과적으로 사회주의연대성의 개념을 제시한 것으로서 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각각의 개념이 맞물리는 논리의 맥락은 사뭇 자의적이다. 거시적 국가 공동체는 그 규모와 무관하게 다양한 원리에 입각하여 성립할 수 있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성격을 규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미시적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거시와 미시는 규모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지, 그 내부의 작동원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중권이 제3의 길로 제시한 사회주의연대성의 개념은 거시와 미시 공동체에서도 얼마든지 작동할 수가 있다. 또 다른 생태, 히피, 페미 등의 공동체에도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된다. 여기서 진중권은 규모와 작동의 원리를 자의적으로 연결하는 오류를 범했다.

또 다른 오류는 국가 공동체의 개념 자체를 자의적, 일방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국가의 개념이나 작동원리도 획일적인 것이 아니다. 먼저 국가를 구성하는 제1요소는 민중 시민(국민)이다. 한국 헌법 제1조에서 모든 권력의 원천이 국민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형식에 그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같은 원리를 품고 있다. 진중권이 국가주의를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도록 강요하는 것으로서,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개인의 해방과 대조적인 것으로 설정할 때, 그런 국가공동체는 많은 유형 가운데에 하나일 뿐이며 일반화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의회제도를 지향하는 진중권은 시민을 잠재적 좀비로 본다

진중권이 안철수 신당 발기인대회에서 한 말에 따르면, “정치를 통해 무엇이 참인가, 거짓인가 수많은 논쟁과 대화를 통해 사람들을 똑똑하게 해야 한다고 한다. “똑똑해져야 한다가 아니라 똑똑하게 해야 한다라고 한 것은 시민이 스스로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민을 똑똑하게 만드는 주체가 따로 있음을 뜻한다. 이어서 그가 한 말도 같은 맥락에 있다.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사람들을 윤리적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정치의 기능이다”, “그들(조국 전 장관을 비롯한 이들)이 이런 정치의 기능을 마비시켜버렸다, (대중이) 논리적 생각을 못하게 만들었다. 대중들만 아니라 멀쩡하던 지식인들도 이상해졌다”, “유시민씨 이분은 아주 개그계로 진출했다”, “저들은 시민들을 자신에게 선동당하는 존재로 생각한다. 얼마든지 동원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중권) 대중들에 대해 그들이 갖고 있는 이런 생각이 너무 혐오스럽다등의 언급이 그러하다. 그러니 진중권은 시민이 스스로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중권은 모든 시민이 스스로 판단하고 정당을 지지해도 정당이 자기 기준에서 벗어나면 비판할 수 있는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는 시민으로 태어났다믿는다.”고 한다. 여기서 진중권은 시민이 스스로 판단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절차상 정당을 지지하거나 비판하는 것으로 표출된다고 본다는 말이다. 정당을 통해서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간접 참여이니까, 진중권에게는 시민의 직접 참여의 개념이 결핍되어 있다.

진중권이 절차상 직접민주제가 아니라 대의의 의회제도 혹은 정당정치를 전제로 한 것은 시민의 자질에 대한 일말의 불신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시민을 정치가들에 의해 선동당하는 존재로 폄하하고 있는 것도 그 같은 맥락에 있다. “‘비판할 수 있는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는 시민으로 태어났다고 믿는다라고 할 때의 믿는다라는 것은 하나의 가능성, 자신의 희망을 말하는 것일 뿐, 현재로서 시민이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만일 그가 현재 시민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었다면, 특정 정치가들이 민중을 선동하고 또 거기에 시민들이 속아 넘어간다고 그렇게 안달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국과 유시민에 대한 진중권의 비난은 근본적으로 시민들의 판단력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조국이나 유시민의 부정직함, 선동성의 문제가 아니다. 진중권은 시민의 능력 자체를 불신하고 있고, 그렇다면 건전한 민주정치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이유를 막론하고 시민이 좀비로 전락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민주정 자체의 존립의 근거를 회의하는 것으로서, 일부 정치가의 정직성 문제로 치부할 일이 아닌 것이다.

진중권이 추구한 분배정의와 평등은 도덕성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통해 이루어진다

진중권은 위 창당 발기인 대회의 같은 강연에서 최선의 정치는 정직이라고 했단다.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 있고, 일부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있어도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진중권은 모순된 두 가지 명제를 동시에 제시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는 분배정의, 사회보장, 약자 및 소수자에 대한 보호이고, 다른 하나는 정직성이다. 이 두 가지는 다 이상적이지만,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성할 필요가 있다.

분배의 정의는 사회구조적인 맥락에 있고, 정직의 도덕성은 개인의 성향에서 출발한다. 또 분배정의는 불공정한 분배의 현실과 싸우고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가진 것이지만, 그 투쟁의 동력은 반드시 정직이라는 도덕성과 맞물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직성 여부와 무관하게 욕망으로 연결된다. 남들만큼 나도 나누어 받겠다는 것은 분배의 정의는 정직이 아니라 욕망에 더 근접하다 평등의 이념도 정직성 여부와 무관하게 욕망의 소산이다. 정직하다는 것이 반드시 분배 정의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두 개념은 서로 다른 맥락에 있다. 그런데 진중권은 이 두 가지 개념이 서로 연결된 것이라고 보는 것 같고, 그런 점에서 그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미학자(美學者)인 진중권은 정치를 잘 모른다

진중권은 한편으로 공정과 정의를 내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스스로 정치는 잘 모른다고 말했다. 사실인지 겸양의 말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자신에 대한 이런 평가가 전혀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사회과학이나 법학 전공자가 아니고 이른바 미학자(美學者)로 알려진 그는 딱 그만큼의 자리에 서 있다. 미학이란 예술철학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게 사회과학 쪽 하고는 아무래도 거리가 좀 있는 것이다.

문외한이 미학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수가 없겠으나, 적어도 사회과학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수준을 절대시하거나 남에게 강요할 수 있는 그런 영역이 아니다. 진중권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대화와 합의가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중권이 이해하고 있는 국가-공동체, 자유-민주, 정의-사회주의, 정직-평등, 노동조합과 의회제도에 대한 개념 등이 제자리에 차분하게 정착하지 못하고 자의적인 의미와 모순된 관계의 맥락에서 온통 비약하고 있다. 그래서 진중권이 전개하는 담론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 같다.

또 시민은 진중권이 걱정하는 것만큼이나 선동이나 거짓에 넘어가기만 하는 부질없고 비이성적인 존재인 것은 아니라는 점도 지적해두어야 하겠다. 더구나 일부 부정직한 정치가가 시민을 비이성으로 몰아넣을 수도 없거니와, 만일 시민이 그런 선동에 넘어간다면 그것은 이미 선동하는 정치가만 탓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민 스스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뜻이 되므로, 좀 더 근원적인 반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시민을 좀비로 만드는 것은 일부 정치가의 부정직함이나 거짓됨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구조적 측면에서 위정자들에게 집중된 권력 때문이다. 그것은 이전 정권이나 현 정권, 혹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현재 한국의 권력구조 일반에 적용되는 사실이다. 위정자와 시민들 간의 권력 관계가 정치가의 개인적 도덕성보다 우선한다는 말이다. 도덕성으로 말하자면, 정치가만 논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포함한 시민 전체의 자질론으로 확산되어야 하겠다. 시민이 깨어야 나라가 산다. 그래서 깨시민!!

권력구조 개선의 차원에서 시급한 현안으로서, 의회제도나 정당정치가 원용될 수도 있겠으나 그 가부를 결정하는 자체가 시민이어야 하고, 공리같이 절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국회가 아니라 시민 민중의 대화와 합의를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헌법 제1조에 규정된 바, 모든 권력의 원천은 의회가 아니라 시민(국민)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시민 민중은 그 결정권을 빼앗긴 채 되찾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유신독재 때 빼앗겨버린 것이지만 지금의 국회도 여전히 돌려줄 염을 내지 않고 있는 국민개헌발안권을 돌려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진중권은 개인을 매도하는 데 골몰하지 말고, 오히려 그가 제도로서 지지하는 의회를 매도하고 다그쳐야 할 것이다. 짐짓 개인의 정직성을 매도하는 진중권의 노파심은 아무래도 핵심을 비껴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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