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를 비롯한 이상주의의 실패, '실질적 민주주의'의 부재가 원인
마르크스를 비롯한 이상주의의 실패, '실질적 민주주의'의 부재가 원인
  • 최자영 (전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
  • 승인 2020.03.23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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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 노동자의 독재’는 존재할 수 없다
사회주의 이상향을 추구했던 마르크스. 대부분의 이상주의가 실패하는 것은 현실적인,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작동과 관련되어 있다.
사회주의 이상향을 추구했던 마르크스. 대부분의 이상주의가 실패하는 것은 현실적인,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작동과 관련되어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 자신의 이론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고, 또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도 이상적 사회에 이르는 방법이 다양하다. 예를 들면, 한편에 로자 룩셈부르크 혹은 레닌의 혁명적 공산주의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혁명이 아니라 점진적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사회민주 계열의 베른슈타인, 또 베른슈타인과 적대했으나 결국 베른슈타인의 아류로 간주되어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힌 카우츠키 등이 있다.

혁명을 지지하는 ‘정통’ 마르크스 주의자는 수정 혹은 개량주의를 부정한다. 혁명을 위한 결정적 순간이 오면 자본가에 대신하여 노동자(프롤레타리아)가 독재 권력을 장악하고, 그 권력은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평등 세상을 이루는 데 이용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산수단의 사유(私有) 여부에 따른 경제적 하부구조가 정치 권력의 상부구조에 우선한다는 이론, 또 혁명의 적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의 이론은 함정을 가지고 있다. 그 이론의 진실 여부는 차치하고, 현재적 사회개혁의 의지를 애초에 단념시키는 효과를 발생하기 때문이다. 노동자(프롤레타리아)는 자본가 계층을 타도하기 위해 때를 기다려야 하는데, 그것은 노동자-자본가 간 갈등이 극대화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가 괴멸되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조금이라도 사회적 갈등이 더 격화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갈등의 극대화는 노동자 편의 엄청난 희생을 전제로 한다. 지옥을 겪은 다음이라야 천국이 온다는 말과 같다. 갈등의 격화란 노동자 측이 극도의 질곡으로 떨어진다는 뜻이고, 당연히 그 반대급부로서 자본가는 이득을 보게 된다. 노동자의 질곡과 자본가가 누리는 이득은 확실한 현실이지만, 필연적으로 오게 될 것이라고 하는 노동자들의 ‘독재’는 올지 안 올지, 또 온다 해도 언제가 그 적기(適期)인지 하는 것이 미지수이다.

그런데 그런 불확실성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마침내 ‘독재’ 권력을 빼앗기 위해 사회적 갈등의 극대화를 기다리는 노동자들은 자연히 현재의 질곡이나 비리의 수정, 미시적인 사회개혁의 노력을 게을리하게 된다. 아니, ‘게을리’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갈등이 극대화하도록 조장해야 한다. 이상 사회의 도래를 하루라도 앞당기기 위해서 무엇을 고쳐가면 안 되는 것이다. 점진적 개량주의를 택했던 베른슈타인이 이단 마르크스주의자로 분류된 것이 바로 그 반증이 된다.

평등사회를 향한 중간 단계로서의 ‘노동자 독재 체제’나 궁극적인 이상적 세계가 현재가 아닌 미래로 연기되는 것은 일부 기독교도가 진정한 삶을 죽음 다음에 오는 ‘삶’으로 연기하는 사후의 천국, 혹은 예수의 재림, 천년왕국 등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혁명 이론은 기독교에서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말씀’을 실천하는 ‘현재’의 삶, ‘이 땅’의 삶과는 다른 방향에 있다.

‘기다림’의 교리는 현재 부딪는 미시적 제도의 결함에 대한 개혁의 동력을 약화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초래하는 현재의 불평등을 오히려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뿐 아니라 노사 갈등의 계급문제에 집중함으로써 또 다른 사회적 제도의 모순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거나 간과하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 그 한 예가 생산수단의 사유에 따른 경제적 계급 간 불평등과는 다른 차원의 적폐로서 속물의 인간이 권력을 오·남용하는 데 따른 사회적 패착으로서의 부정부패이다.

청와대와 양승태 간 사법권력 농단 혐의의 근본 원인은 개인의 도덕성보다 집권의 권력구조에 있다

박근혜 청와대가 삼성 이재용과 결탁한 혐의, 또 양승태 전대법원장과 결탁하여 사법권력을 농단한 혐의는 자본주의가 갖는 계급 간 불평등과는 또 다른 차원의 적폐이다. 이런 권력의 부패는 모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식민지배와 개발독재의 전통을 이은 한국이 갖는 집권의 권력 구조하에서 가능하거나 심화하는 것이다.

편법으로 공정거래마저 배반한 가운데 정치권력이 맞물려서 빚어지는 이런 일탈까지 생산수단을 사유한 자본주의 탓이라고만 욕을 하고 있다면 아무래도 정합적인 것이 아니다. 아무리 결점을 가진 것이라고 쳐도, 자본주의는 약방의 감초는 아닌 것이다. 생산수단만 사회화된다면 욕망의 인간이 거듭나서 부정부패 없는 세상이 된다는 보장도 없는 터에 말이다. 어떤 사회 경제적 조건하에서도 인간성은 불변하며, 욕망과 갈등의 역사는 어이질 전망에 있다.

여기서 박근혜, 이재용, 양승태 등 개인을 아무리 닦달한다 해도 근원적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새길 필요가 있다. 이들은 일시의 출연자에 불과하고, 뒤에서 이들의 출연을 가능하게 한 연출자는 바로 집권의 권력 구조이기 때문이다. 적폐를 쉬 양산하는 집권적 권력 구조를 손보지 않고 그냥 개인을 처벌하는 것에 그친다면 제2의 박근혜, 이재용, 양승태는 언제든지 다시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

독재의 권력 조직은 ‘다수’ 혹은 ‘노동자’가 아니라 오로지 ‘소수’의 의지에 기여한다

‘기다림’의 교리뿐 아니라 ‘다수 노동자의 독재’라는 개념에서도 마르크스주의는 허점이 있다. ‘다수’와 ‘독재’는 서로 정합적으로 어울리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수 노동자’가 어떻게 ‘독재 권력’을 행사하나? 다수가 권력을 행사하려면 오히려 그 권력은 민주적으로 분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독재는 권력의 집중을 전제로 하고 그 주체는 소수가 된다.

마르크스주의의 교설에 따르면, 다수 노동자의 ‘독재’는 그 다음에 올 ‘생산수단의 사회화에 의해 만인이 평등한 세상’으로 이어지게 될 일시적인 과도기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에 불과할 뿐 반드시 현실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의 필연적인 속성에 의해 독재 권력은 소수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이다.

그 예는 주변에 널려있다. 가까이는 형식만 민주정치일 뿐, 실제로는 위정자들의 과두정에 불과한 한국으로부터, 멀리는 프롤레타리아의 이름으로 독재 권력을 구사한 소련의 레닌과 스탈린, 중공의 모택동 같이, 다수 노동자의 이름을 내걸고 소수의 대리자가 권력 행사한다. 소련과 중공의 경우에 그 인민의 권력을 대리한 자가 다소간 생산수단을 사회화한 경우에도, 집중된 권력으로서의 독재가 빚어내는 또 다른 속성에 의해 자유와 평등의 이상향은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독재 아닌 분권의 권력 구조에서 노사 갈등이 최소화된 사례는 도외시한다. 그 같은 것은 노동자 독재체제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의 사멸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사전에 없는 예외의 특수한 현상으로 간주될 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스위스 직접민주정치이다. 스위스에서는 국가 관할의 국민병이 아니라 자체무장한 시민병 중심이 되고, 분권에 입각한 자치와 자유의 스위스 시민은 각급 지자체 단위가 중심이 된 하의상달의 권력 구조의 주체를 이루고 있다.

빈자나 노동자도 부자나 자본가와 똑같이 탐욕하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가 자본가 대신 국가의 독재 권력을 장악하면, 그 권력이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도모하는 데 쓰일 것이라는 기대를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 희망에 그칠 뿐, 독재 권력이 그런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될 것이라는 보장은 사실 없다. 자본가는 탐욕하고 ‘노동자 계급’은 서로를 배려하여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도모할 것이라는 전제가 비현실적이다. 다수 노동자도 자본가 혹은 부자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욕망의 존재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혹은 빈자라고 해서 자본가 혹은 부자와 달리 타인을 배려하여 급기야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는 허황하다.

이미 기원전 594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국부(國父)로 존경 받았던 솔론은 부자, 빈자를 가리지 않고 인간이 욕망의 존재라는 점을 간파했다. 그는 시민 민중들로부터 경제적 불평등의 시정을 위한 임무를 위임받아 개혁을 추진했다. 아테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테네 국제>에는 그가 지어서 남긴 것으로 전하는 시(詩)가 있는데, 여기서 그는 “가진 자는 아무 것도 나누어주려고 하지 않고, 갖지 않은 자도 똑같이 탐욕스러워서 모든 것을 나누어 갖기를 원한다”고 한다. 그래서 솔론은 부자와 빈자 중 어느 한 편의 요구에 편승하지 않고 중도의 개혁을 했다. 그 중도란 빈부 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부채를 말소하고 토지재분배는 하지 않았던 것을 뜻한다.

‘국가의 권력’이 ‘노동자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집권적 권력 구조’가 ‘시민의 자유를 억압’한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인간 삶의 물질적 토대로서 생산수단인 토지의 사적 소유가 계급지배의 바탕을 이루고, 또 국가의 권력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억압하는 도구이다. 자본주의적 계급사회에서는 소수의 자유와 다수의 평등이 서로 충돌하고, 또 개인과 국가가 충돌한다고 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계속되는 한 이 모순은 해결할 수 없으며, 다수의 독재를 거쳐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이룬 다음에야 해소될 것이란다. 그 과도기에 나타날 노동자 독재는 궁극적으로 계급지배를 정당화하는 국가를 해체하고 계급을 철폐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국가 해체의 시도는 이미 19세기 중후반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이루어진 바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에서 개인 및 소규모 집단의 테러나 무장봉기를 통해 추진된 그 시도는 널리 확산하거나 대중의 지지를 얻거나 하지 못했다.

반면, 마르크스는 당시 유럽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다수의 지배라는 민주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수의 자유는 사회집단으로서의 계급 개념과 분리할 수 없고 계급을 철폐함으로써 비로소 실현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궁극적으로 국가의 철폐를 지향한 점에서 아나키즘과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단순한 국가권력의 해체가 아니라 더 근원적으로 불평등한 생산수단의 사유에 근거한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계급제도의 철폐를 지향한 점에서 아나키즘과 차이가 있다.

여기서 자유와 계급 철폐의 개념을 바로 연결한 마르크스의 이론은 딱히 정합적인 것이 아니다. 자유에 대응하는 것은 부자유, 혹은 독재에 의한 억압이 되는 것이고, 이것은 권력구조적인 개념이다. 반면, 마르크스가 말하는 ‘계급’이란 토지 등 생산수단의 유무에 따른 사회집단의 구분이다. 이 두 개념은 동일 맥락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므로, 서로 필연적 연관성을 갖지 못한다. 다수 노동자가 부르조아가 독재하는 국가의 권력을 빼앗아서 권력의 주체가 바뀐다고 해도, 또 그것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독재 권력이라는 속성 자체가 자유와 민주와 같은 맥락에 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과 달리, 반드시 ‘노동자의 독재 다음에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오는 것’이 아니었다. 하부구조는 상부구조에 영향을 줄 수는 있으나 모든 것을 결정하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실제로 쏘련이나 중공 등, 다소간 마르크스 주의를 추종하여 일어났던 혁명은 하부구조의 노사 간 갈등의 심화에 따른 일시적 혁명이라는 이론에 들어맞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쏘련의 볼쉐비키나 중공의 모택동은 권력의 쟁취를 통해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도모할 수가 있었다. 또 그 권력은 다수 노동자가 창출한 것이 아니었고, 소비에트( 노동자·농민·병사의 대표자가 구성하는 평의회)의 이상은 결국 소수 권력자의 독재로 귀결되었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이론은 수정되어야 한다. ‘다수 노동자’ 대신 노동자를 포함한 ‘보편적 시민’의 개념으로 확대하고, 또 생산수단의 사회화나 기본소득 등 다소간 이상적 사회제도를 실현할 권력은 독재 대신 원심적 풀뿌리 분권의 개념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혁명은 반드시 노사 갈등의 극대화를 기다릴 필요가 없고 일거에 폭발적으로 일어나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핵심은 변혁의 형태, 속도, 순서가 아니라 분권이라는 본질로 환원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와 집권이 맞물리면 소수 부르조아 계급의 이익에 유리하게 되고, 자유와 풀뿌리 분권이 맞물리면, 그 주체가 노동자이든 일반 시민이든 간에 다수의 권리와 이익에 기여하게 된다.

베른슈타인은 일시적 혁명을 부정하고 점진적 개혁의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했으나, 권력 구조적으로 의회제도를 통한 간접민주정치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출신 계층을 불문하고 의회 위정자에게 집중된 권력구조를 전제로 했다는 점에서 분권과 민중의 주권이라는 풀뿌리 직접민주주의의 개념을 결핍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지금 한국의 식물 국회만큼 대의의 의회제가 갖는 페단을 더 잘 증명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소수 자본가가 권력을 장악한 국가를 폐지한다는 것은 사실 국가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권력의 주체와 구조를 바꾸는 것이 되어야 한다. 노동자의 개념을 ‘시민’으로 대치하고 집중된 권력을 ‘풀뿌리 분권’으로 바꾸는 것이다.

평등은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토지를 가진 사람들은 자유롭고, 갖지 않은 사람들은 부자유하다‘라는 논리는 언제나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독일은 토지와 가옥 등 부동산을 소유하면 엄청난 세금을 내야하므로 오히려 그 소유주가 그 소유를 회피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생산수단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부르주아 계급’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의 사유는 불가피하게 잉여가치의 착취와 부르조아 계급의 형성으로 이어진다고 보았으나 그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생산수단이 갖는 기능이 원천적으로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며, 그 결정권을 누가 갖는가에 따라 그것이 갖는 사회적 역할도 달라진다는 점이다. 확률적으로 소수 자본가가 결정하면 생산수단이 갖는 기능을 높게 설정할 것이고, 그것을 소유하지 않은 다수 민중이 결정하면 낮아지게 될 것이다. 당연히 ‘독재’가 아니라 생산수단을 갖지 않은 다수 민중이 발언권을 행사하는 ‘분권’의 민주체제에서 생산수단이 갖는 경제적 가치를 낮출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노사 간 갈등의 심화, 혁명, 노동자에 의한 독재 권력의 장악 등의 과정이 불필요하게 된다.

더구나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통하지 않고도 자본 혹은 자본가를 견제하고 노동자 혹은 민중의 자유를 확보하는 방법이 또 있다. 지나친 부의 편중 대해 시민의 이름으로 필요한 만큼 ‘사회적 회수’의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사회적 회수’의 민주적 결정은 생산수단 사유 여부의 경제적 여건과 무관하며, 소수의 독재가 아니라 다수의 이해를 반영할 수 있는 분권의 풀뿌리 민주주의에서 가능하다.

이 때 지나친 부란 한국의 전제 인구 5% 미만이 전체 국토의 50-60% 이상을 가지고 있다던가, 10% 미만의 인구가 70-80%의 국토를 소유하고 있다거나, 미성년자가 100여채의 가옥을 보유하고 있고, 성인 1명이 수백 채의 집을 소유하고 있는 현상 같은 것이다. 그리고 필요한 만큼이란 요즈음 회자되는 기본소득 같은 것이다.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해야만 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사고방식은 그 자체로서 획일적인 강요이며 독재적 발상이다. 그 대신 생산수단이 갖는 경제적 힘의 정도를 사회적으로 유연하게 결정하며, 생산수단 및 자본뿐 아니라 운(運)이나 불법, 편법, 부정, 사기 등 온갖 과정에 의해 초래된 부를 사회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은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다. 어느 정도의 사회적 평등을 위해 어떤 방법을 원용할 것인가를 다수의 의견으로 결정하는 자체가 민주적 절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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