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독재 권력구조를 지향하는 거대 여당과 그 앞에 침묵하는 우리 자신을 규탄한다.
개발독재 권력구조를 지향하는 거대 여당과 그 앞에 침묵하는 우리 자신을 규탄한다.
  • 최자영(전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
  • 승인 2020.05.08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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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는 신이 아니고 보통 사람이다

4.15총선 의식(儀式)180석 거대 여당의 탄생으로 막을 내렸다. ‘의식이라 함은 그저 치루어야 하니까 치루었을 뿐이라는 뜻이다. 이른바 진보를 자처하는 쪽에 거는 기대가 무색할 정도로 여야 국회의원의 생리가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이고 서로 공생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당 원내대표 후보자 3인
여당 원내대표 후보자 3인

 

이낙연 전총리가 이천 화재 사고현장을 찾았다. 유가족들은 "노동자들의 죽음이 계속 이어지는데 어떻게 할 거냐", "이번 사고에 대한 대책을 갖고 왔나" 등의 질문을 쏟아냈고, 이 전총리는 "제가 지금 현직에 있지 않아 책임이 있는 위치에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해서 유가족들이 격앙된 반응을 보였단다. 이 사건을 두고 장제원 통합당 의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 전 총리는 너무너무 맞는 말을 너무너무 논리적으로 틀린 말 하나 없이 하셨다"고 했단다.

장제원의 말이 맞다. 이 전총리가 "제가 지금 현직에 있지 않아 책임이 있는 위치에 있는 게 아니다"라고 한 말이 일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낙연이 방금 전까지가 아니라 현재총리로 책임있는 자리에 있다고 해도 그가 하는 일은 크게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이천 화재는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그전부터 열악한 노동현장에 대한 문제가 불거졌으나, 그가 무엇을 고쳐서 달라지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천 화재는 사건 발생 이전의 사회적 조건에서 파생된 것이다. 특히 꽃다운 나이 김용균이 혼자서 한밤중에 어딘가 기계에 끼어서 죽었을 때부터 열악한 노동 환경에 대한 여론이 환기되었고 김용균 법까지 통과되었으나 실상 현장에서는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세간의 평이다. 그 후 이천 화재가 발생하기까지 흘렀던 그 시간 속에 이낙연은 총리로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총리가 아니어서 책임이 없다고 할 것이 아니라, 총리로 있을 때 노동조건을 개선하지 못한 데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위정자들의 계산 기준은 달랐다. 그 유족과의 모임에서 이낙연이 받아 보고 있었던 휴대전화 문자는 다시 (화재현장을 찾아) 가시게 되면 잘못을 시인하게 되는 것이 된다는 염려의 전갈이었다. 참사를 앞두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의 책임을 어떻게 모면할 것인가 하는 것이 위정자에게는 더 중요했다. 그리고 미래통합당 국회의원 장제원은 그런 이낙연 전총리의 말이 너무너무 논리적으로 틀린 말 하나 없이 하셨다고 한다.

이낙연도 맞고 장제원도 맞다. 원래 위정자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또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할 수가 없다는 것은 무엇보다 현장의 사정에 익숙하지 않아서 아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노동조건의 열악함은 직접 몸담아 일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만이 전달될 수가 있는데, 그들의 입은 막혀있고 의견을 개진하거나 반영될 수 있는 제도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고작 하는 것이 총리나 국회의원 같이 높은사람들이 오면 봐 달라고 부탁하는 것인데, 그런 부탁해 봐야 돌아서면 흔히 잊어버린다. 총리를 지낸 이도 자신이 책임질 것이 없다고 하는 판이다. 또 당사자가 아닌 이는 직접 피해를 본 것이 아니므로 그 피해와 울분의 정도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총리나 국회의원이 만능의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은 누구나 평범해서 자기가 당한 것에 능하다.

 

현장 사정에 무지하고 책임도 안 지는 총리나 국회의원이 결정권을 독점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양쪽에 다 있다. 총리나 국회의원은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한 일에 결정권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 민초들 측에서는 현장을 잘 모르는 사람인데도 지위가 높으니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부탁을 하기 때문이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안에 대해서 결정권을 독점하는 것은 민주적인 것도 효과적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민초가 높은 사람들이 무언가 해주기를 바라고 앉아있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이고 높은 것을 숭배하는 봉건적 사고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해결되는 것 없이, 민중은 하릴없이 날마다 명복만 빌고 있다”.

어디로 향하는지 방향도 없는 울음, 허공을 향한 울음, 절벽에 대고 우는 울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울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의 울음”(김훈, 우리는 왜 날마다 명복을 비는가, 한겨레, 2020.5.7. 1)을 우는 것은 우는 사람들 자신의 탓이다. 아는 것도 의지도 없고, 능력도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을 믿고 기대고 부탁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아는 것을 토로하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으려는 몸짓 없이 안이하게 시키는 대로, 그것도 잘 모르는 사람이, 책임도 안 지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 밥그릇조차 챙기지를 못한다. 조금 전까지 총리를 지냈고, 곧 국회에 입성할 사람도 잘 모르고 책임도 지지 않는 보통 사람이라는 사실, 그들에게 부탁을 해봐야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울음 우는 민초들이 스스로 깨닫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적폐는 위정자와 민초 양쪽이 다 박자가 맞아서 생긴다. 봉건적 사고는 위정자와 민중 양쪽이 다 공유하는 것이므로 박자가 맞아서 크게 문제가 되지도 않고 사회가 조용하기만 하다. 그러고 보면, 독재는 독재자 때문이 아니라 그 독재를 배양하는 민초 자신의 가치관에서 비롯되는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국회가 제 할 일을 안 하고 개겨도 지적하며 나무라지 않고 침묵하는 민초들 자신의 탓이다.

 

과두정치의 국회에서 여야는 동색이다

4.15총선 의식이 거대 여당 탄생으로 선거가 마무리되고 나니, 서로 밥그릇 뺏기에 열중하던 여당과 야당의 입장이 상당히 근접하는 모양새이다. 여당이 열을 낼 것같던 개혁의 고삐를 늧추는 데서 그러하다. 시민 민중의 개헌 요구를 묵살하고, 그 외 갖가지 정책에서 소걸음 아니면 오히려 뒷걸음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고가주택과 다주택자의 종합부동산세를 올리려던 정부계획이 무산되는 분위기란다. 종부세 강화는 지난해 12.16 부동산 대책의 핵심이지만, 미래통합당이 반대하고 더불어민주당도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여야가 동색이다. 국회가 안 움직이면 아무 것도 안 된다. 민초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이 그저 손에 땀만 쥐고 용만 쓰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허공을 향한 울음을 울지 않으려면 다시 촛불을 들어야 한다.

국민 70% 이상이 원하는 개헌도 국회에서 여야가 공히 뭉개고 있다. 4.15 총선 직전에는 여야 국회의원 몇 명이 모여서 국민개헌발안권 개헌 발의를 하더니만, 총선이 끝나고 나자 쑥 들어갔다. 국민개헌발안권보다 경제난국 극복의 과제가 더 중요하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국민개헌발안권과 경제난국 극복은 따로 가는 것이 아니다. 두 개념은 서로 배타적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거대 여당에서 서로 필연적인 고리도 없는 두 개념을 맞대어서, 경제 논리를 끄집어내면서 '국민발안권 개헌'을 뒤로 밀자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국민발안권'은 마음에 들지 않으니, 논의하고 싶지 않다란 뜻이다. 거대 여당으로 탄생하자 말자, 여당은 국민헌발안권은 앞으로도 당의 의제로 삼지 않을 것이고, 정권 끝날 때까지 논의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들린.

국민발안권을 되돌려달라고 했더니, 언제부터인가 발안권을 슬그머니 빼버리고 국민소환권을 전면에 부각하기 시작했다. 양자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국민발안권은 주권자 민중이 법안을 발의할 수 있지만, 소환제는 그런 권한이 시민 민중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발안제는 뒤로 감추고, 소환제를 떠드는 이도 내심 주권자 민중의 발안권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심보이다. 그것은 명색이 주권자라는 민초가 개헌발안의 권한조차 없이 오히려 위정자들의 들러리 신세가 되라는 뜻이다.

더구나 공직자를 소환하는 것은 국회의원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법관, 검사 등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법관을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이 국회에 주어져 있지만, 건국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법관을 소환한 적이 없다. 그래서 국민이 보충하여 나서야 한다. 또 그 소환의 범위를 결정하는 권한도 위정자 국회의원이 아니라 주권자 민중에게 주어져야 한다.

국민개헌발안권은 박정희 유신독재 때 국민으로부터 빼앗아간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되돌려주지 않으려고 정합성도 없이 엉뚱한 구실을 갖다 대는 거대 여당을 보면 암담하다. 현 거대 여당이 존속하는 한 국민개헌발안권은 되돌려 받을 것 같지 않고, 그런 점에서 거대 여당은 박정희 유신독재의 국회와 닮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180 의석 거대 여당의 의원들이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명색이 하나하나 헌법기관이라고 하는 국회의원이 하는 발언이 거의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현재까지 원대 대표에 도전한 3인의 발언을 보면 그러하다. 며칠 전에는 경제와 코로나 사태를 빌미로 국민개헌발안권의제를 밀어내더니, 오늘은 공수처검찰개혁을 다같이 앵무새처럼 읊고 있다. ‘공수처검찰개혁은 필히 추진해야 하겠으나,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산재해있는데도, 똑같이 한두 가지만 선전용으로 읊조리는 것이 개발독재 정권과 닮은 점이 있다. 여당 지도부의 사고는 여전히 70년대 독재 시대의 가치관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여당 원내대표로 4선 김태년 의원이 당선되고 한 다음, 코로나 위기 극복이 국회의 기본적 임무라고 하고, ··청이 역량을 모으고 또 소모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야당과 협상하고 싶다고 했단다. 여기에 시민 민초의 목소리가 들어설 틈은 보이지 않는다. 여당, 정부, 청와대, 그리고 야당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열심히 하고 있는 코로나 방역사업에 어찌 국회가 숟가락을 얻으려 하나? 이게 역할분담이라는 개념도 없다. 원내대표가 코로나에 집중하겠다고 발언한 것은 인기몰이용인 것 같고, 아마도 이번 4.15 총선에서 코로나 대처로 점수를 땄다는 생각 때문인 것도 같다. 김태년은 경제, 일자리, 국민 고통 이기 등도 언급했으나 이마저 피상적일 뿐 구체성이 없다. 무엇보다 그는 현장경험이 없어 잘 모르기 때문이고, 또 그 협조와 협상의 대상이 다 같이 잘 모르고 책임도 안 지는 당··청의 위정자뿐이기 때문이다. 현장에 있는 민초 시민이 쏙 빠졌다.

 

위정자와 시민운동의 독선을 함께 경계 한다

위정자도 시민운동 하는 이들도 다 혼동하는 것이 있다. 재난지원금, 전국민고용보험, 검찰개혁 등, 수박 겉핥기의 선언적인 몇 가지 정책의 제시는 피상적이다. 더 다양하고 세부적이고 효과적인 정책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섬세한 현장 실태의 점검과 더 치밀한 정책 입안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현장의 사정을 모르는 국회의원들이 앉아서 국회중심으로 다 결정을 한다고 한다. 이해찬 당 대표가 21대 국회가 할 정책과제를 결정한다고 할 때도 잘 모르고 책임도 안 지는 국회의원들이 중심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관례를 보면, 현장과의 소통이 잘 될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국민발안권'도 돌려주기 싫어서 갖가지 핑계를 다 대고 있는 국회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국회는 관성에 젖어 적폐를 아예 해결하기 싫어하는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낳기까지 한다.

피상적인 경제 논리나 몇 가지 인기몰이식 선언적 구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방식은 곳곳에 산적한 적폐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것은 소수 위정자, 혹은 그 보좌관들, 마찬가지로 소수의 시민운동가들이 소화해내기에는 너무 광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시적으로 풀뿌리 시민 민중, 노동자의 협조를 얻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문외한인 위정자가 가진 결정권을 현장에 정통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야 하겠다. 또 '국민발안'을 통해서 소수 위정자들의 욕심과 편견을 견제하고 자칫 주제와 내용에서 편파적일 수 있는 소수 위정자의 결정을 보완하도록 해야 한다.

 

일부 위정자가 선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다수의 선의를 보증하는 것이 아니다. 또 선의를 가지고 한 일도 실수가 있다.

그래서 널리 의견을 구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현장에서 뛰는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서 개선은 이루어지게 된다. 또 공직자가 고의든 실수든 잘못 할 때에 그 잘못에 대해 책임을 물어서 처벌하고 손해배상을 지우는 주체는 당연히 주권자 민중이 되어야 한다. 이는 지난 과오가 아니라 미래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이미 경험했던 이명박그네 정부 같은 것이 다시 들어섰다고 해보자. 또 지금같이 국회가 태만하고 사법권력이 농단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속수무책이다. 아니, 다시 엄동설한에 거리로 나서서 외쳐야 하는 원시적 상황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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