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년 전, 오늘(13일) 이재명 의사 순국하다
110년 전, 오늘(13일) 이재명 의사 순국하다
  • 김태희(직접민주주의뉴스 편집장)
  • 승인 2020.09.14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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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년 전 오늘 1910913일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이재명 의사가 순국한 날이다. 이 의사는 국적 이완용을 처단하고자 의거에 나섰다가 미수에 그친 뒤 현행범으로 잡혔다. 이 의사는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그의 의협심은 친일 매국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일제에는 두려움을 안겼다.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고  체포되어 1910년 9월 13일에 사형이 집행 되었다.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고 체포되어 1910년 9월 13일에 사형이 집행 되었다.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난 이재명은 17살 때인 1904, 노동 이민으로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갔다. 그러던 중 고국에서 한일협약과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 소식을 듣게 된다. 조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1907년 귀국한 이재명은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을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이재명은 뜻을 같이 할 동지를 모으며 기회를 기다렸다. 계획을 진행하던 중인 190910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다. 안중근의 거사로 국내외에는 긴장 분위기가 흐른다.

19091월 순종 황제의 서도(평안도) 순시 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동행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들을 처단하고자 동지 몇 사람과 함께 평양역에서 대기하였다. 그러나 거사는 안창호의 만류로 중지되고 말았다. 도산은 이토가 제 신변의 위험을 염려해 순종 곁을 떠나지 않으니 황제의 안전을 위해서 발포를 말린 것이었다.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 이완용 습격

그러나 이재명은 이토 처단에 대한 뜻을 꺾지 않았다. 그는 동지 김병록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기회를 엿보던 중,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를 처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그는 침략의 원흉들보다 왜적에게 나라를 파는 데 앞장선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먼저 처단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대한제국의 관료였던 이완용은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맺은 을사조약체결 과정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했다. 이완용은 을사조약체결에 공을 세운 대가로 이토의 추천을 받아 총리대신의 자리까지 오른다. 이완용의 거듭된 변절과 매국행위를 발판 삼아 일본은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본격화한다.

제국주의 침략으로 조국이 위기에 빠지자, 국민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수많은 의사·열사들이 침략자와 불의에 대해 목숨 걸고 저항하며 항일 구국 운동에 앞장섰다.

 

매국노 이완용과 을사조약 문서 사본
매국노 이완용과 을사조약 문서 사본

 

190911월 하순, 이재명과 동지들은 평양 경흥학교 안의 야학당에서 이들 매국적(賣國賊)에 대한 처단 계획을 확정했다. 이완용의 처단은 그와 이동수·김병록이 맡고, 김정익과 조창호는 일진회의 이용구를 처단하기로 했다.

더 이상 이완용의 처단을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이재명은 동지들과 함께 거사를 위한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간다. 그러는 사이 거사를 준비하던 중 신문보도로 이완용을 비롯한 국적(國賊)들이 1223일 오전 종현천주교회당(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것을 알았다. 1223일 오전 1130분께 이재명은 성당 문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이완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총리대신 이완용,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에게 피습

이완용이 인력거를 타고 그의 앞을 지나갈 때 이재명은 비수를 들고 이완용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제지하려는 인력거꾼을 한칼에 제압한 다음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다. 혼이 나간 이완용이 인력거 아래로 떨어지자 그는 이완용을 타고 앉아 어깨 등을 사정없이 난자하였다.

인력거 주변은 유혈이 낭자하였고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판단한 그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순사의 군도에 왼쪽 넓적다리를 찔려 중상을 입고 잡혔다. 이때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유유자적하게 운집한 구경꾼들에게 담배를 빌려 태웠다고 한다.

그를 가로막은 인력거꾼 박원문은 절명했으며, 이완용은 갈비뼈 사이로 폐를 찔리는 등 치명상을 입었으나 대한의원(현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으로 후송돼 일본인 의사들의 외과 수술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거사 소식은 이내 전국에 알려졌다. 두 달 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소식에 쾌재를 불렀던 사람들은 이재명의 실패한 의거를 몹시 안타까워하였다. 구례의 선비 매천 황현은 이 거사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23(음력 1011일 정사)에 이재명이 이완용을 칼로 찔렀지만 죽이지는 못했다. 이재명은 평양 사람으로, 이때 나이 21세였다.(후략)

- <매천야록> 6권 중에서

 

일찍이 백범 김구는 이재명이란 젊은이가 총을 쏘고 난리를 피우면서 아내를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사실은 이완용을 죽이겠다는 자신을 아내가 만류하자 이재명이 여자가 나라 중한 것을 모른다고 화를 낸 것이었다.

이재명을 만나보고 그를 시세의 격변 때문에 헛된 열정에 들뜬 청년으로 보았던 백범과 노백린은 그를 설득하여 후일을 도모하자며 총과 칼을 맡아두었다. 그러나 이재명의 의거 소식을 들은 뒤 백범은 이를 안타까워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의사가 단총을 사용하였다면 국적 이완용의 목숨을 확실히 끊었을 것인데, 눈먼 우리가 간섭하여 무기를 빼앗는 바람에 충분한 성공을 못한 것이다. 한탄과 후회가 그치지 않았다.

- <백범일지> 상권 중에서

 

이재명 의사의 이완용 습격을 다룬 신한민보 보도내용 1909년 12월 29일 자
이재명 의사의 이완용 습격을 다룬 신한민보 보도내용 1909년 12월 29일 자

 

이재명과 동지 12명은 이완용 습격 사건의 피의자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의 첫 재판은 19105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렸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 일본인 재판장인 쓰가하라가 갑자기 이재명의 진술을 중단시키는 일이 일어난다.

재판장 순사가 경호하는 데도 네가 목적한 뜻을 수행하여 이완용이 죽었다고 알았는가 .

이재명 나는 그의 생사를 알지 못하고 잡혔다 .

재판장 너는 권총을 지녔는가 .

이재명 가졌다 .

재판장 다수의 공모자가 있었는가 .

이재명 나 혼자다 .

재판장 왜 이완용을 살해하려고 했는가 .

이재명 이완용을 죽일 죄목은 허다하나 대략 8 개조를 설명될 수 있다 .

을사조약 체결로 인해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일과 조선통감부를 우리나라에 설치케 한 일 .

헤이그특사로 인하여 황제 앞에 3 차에 걸쳐 협박하여 양위케 한 일

정미칠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과 또한 군대를 강제로 해산케 한 일

어린 황태자 ( 리은 ) 를 일본에 인질로 보내고 또한 일본여자와 정책적인 결혼을 시킨 일 .

고종을 일본에 건너가게 획책한 일 .

황제를 강제로 서북지방을 순행케 한 일 .

사법권을 일제에 넘겨 애국지사를 처벌케 한 일 .

표면적으로는 일진회로 하여금 한일 합병케 하기 위하여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시켜 합병케 한 일 .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이재명의 의협심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재명은 재판장을 향해 호통치면서도 동지들을 위해서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돌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재명의 진술에 따라 방청객은 숙연해지기도 했고, 때로는 박수도 쏟아져 나왔다.

재판장 : 피고와 같이 흉행한 사람이 몇 명이냐 .

이재명 : 이 야만 섬나라의 무식한 놈아 ! 너는 흉 ( ) 자만 알지 의 ( ) 자는 모르느냐 . 나는 강도와 같은 너희들을 몰아내 내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네놈들의 앞잡이를 처단하려는 의행 ( 義行 ) 을 한 것이다 .

재판장 :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

이재명 : 2 천만 대한민국 모두이다 ! 야만 왜종들은 퇴청시키고 재판정 창밖에 나열한 한국인을 모두 입장시켜라 .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의 심문에 대답하지 않겠다 . 하고 호령하기도 했다.

그는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忠魂)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고 재판장을 꾸짖었다.

 

불꽃 같은 생애, 광복의 밑거름이 되다

의거에 동참한 동지들 가운데 조창호·이동수·김정익 등은 징역 15, 김병록은 징역 10, 나머지 동지들에겐 징역 16월에서 징역 7년까지를 선고받았다. 이재명에 대한 사형은 1910913일에 집행되었다. 향년 23, 짧았지만 불꽃같은 생애였다.

망국민의 삶은 애국과 매국의 선택에서 극단으로 엇갈렸다. 이재명의 칼끝에서 살아남은 이완용은 피습 이후 강제병합조약을 체결하고 그 매국의 상급(賞給)으로 백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거쳐 1920년 후작에 올라 안락하게 살다가 1926년에 69세로 죽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한국사에서 추악한 매국노로만 기억될 뿐이다.

 

1999년 서울시에서 의거 현장인 명동성당 입구 쪽에 의거 터 표석을 세웠다.
1999년 서울시에서 의거 현장인 명동성당 입구 쪽에 의거 터 표석을 세웠다.

 

1962, 정부에서는 이재명 의사의 공훈과 희생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 의사는 200112월에는 이 달의 독립 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9년 서울시에서 의거 현장인 명동성당 입구 쪽에 의거 터 표석을 세웠다.

 

<매천야록>

조선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생존한 문인 황현이 1864년부터 1910년까지 47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역사서. 비사.

한말 위정자의 비리·비행, 외세의 침략과정, 특히 일제의 만행, 우리 민족의 끈질긴 저항 등이 실려 있어 식민통치가 끝날 때까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저자도 죽을 때, 바깥사람에게 보이지 말 것을 자손에게 당부했다. 그러다가 부본(副本) 1부가 상하이[上海]에 망명해 있던 지우(知友) 김택영(金澤榮)에게 보내져, 김택영이 한사계 韓史綮에 내용의 일부를 인용하여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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