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별기고.1] 하루 한 송이 삼백예순 날 삼백예순 송이
[신년특별기고.1] 하루 한 송이 삼백예순 날 삼백예순 송이
  • 강주영(전주동학혁명기념관 운영위원)
  • 승인 2021.01.05 22: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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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연민과 분노가 엇갈렸다. 세상은 늘 시끄러웠으나 야금야금이라도 앞으로 가지 않았다. 남도의 바닷가를 헤매며 이순신의 조선수군재건길을 훑었다. 마지막 동백이 지자 백년사 만덕산에 동박새가 울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微臣不死...(금신전선 상유십이 미신불사...) 아직 신에게는 전선 12척이 있고 미거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장흥 회진포에서 나는 지금의 언어로 이순신의 장계를 읽을 수 없었다. 내게 무엇이 있는지 세상에 남은 것이 있어 하루 한 송이 이틀에 두 송이 삼백예순 날 삼백예순 송이를 피울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자연이 스스로 피우고 하늘이 부모이니 세상을 다시 기를 것이라고 믿을 뿐이었다. 지난봄 하늘은 맑았고 긴 해안선들에 생명들이 뻗쳐 올랐으나 바다는 아득했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썼다.

때로 자본과 권력에 투항한 것을 당당하게 밝히며 "아직도 이념입니까?" 라는 이들에게 이리 말해주고 싶다. "그렇다. 너는 아직 이념이구나. 너는 부르주아지 이념에 투항했고 나는 만인만물의 이치에 투신했다. 내 기꺼이 너의 무덤에 한 잔 술로 애도를 바치마!"

 

우리 하늘 우리 땅 지킴이 박창현 님 제주도 오름 풍경, 2021년 소띠 해 신축년에 맞는 사진이다. 사람과 자연과 소들이 서로 어우러졌다.
우리 하늘 우리 땅 지킴이 박창현 님 제주도 오름 풍경, 2021년 소띠 해 신축년에 맞는 사진이다. 사람과 자연과 소들이 서로 어우러졌다.

 

자급은 줄고 시장은 더 커졌는데 뉴딜이라 불리웠다. 괴질은 인민이 몇 십 년 해도 하지 못할 삶의 전환 기회가 아니었다. 괴질은 몇십 년 걸려서 해야 할 것을 단 1년 만에 자본의 신천지를 열었다. 괴질은 자본의 동맹자였다.

세계의 석학들이 대안이라고 내놓은 것은 지속가능한 전환, 지속가능한 멈춤후퇴가 아니라 석유 차를 수소 차로 바꾸는 것이다. 차를 적게 쓰는 삶이 아니다. 환경은 자본의 신수종 성장품이다.

자치는 멈추고 이 기관에서 저 기관으로 권력이 이동했는데 개혁이라고 한다. 국가에서 인민에게로가 개혁이라는 믿음은 참으로 초라하다.

사람들은 스스로 그러하게 자연스럽지 않고, 괴질 계엄에 길들여졌다. 이웃과의 연대성이 아닌 거리두기와 익명성이 방역의 앞자리를 차지하면서 괴질 취약층의 불평등이 드러났다.

사회의 인간다움과 자연스러움을 위한 사회운동은 성공하는 운동, 권력화된 운동이 되면서 사회 적폐가 되었다. 조용히 삶을 바꾸는 게 아니라 소란스러움(이슈화)이 여전하다.

 

 

학교는 작아져 마을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디지털 자본의 시장이 되었다. 노조와 아파트 사무실은 농민 직영 매장을 두지 않고 있다. 전복과 탈취, 요구와 쟁취는 넘치는데 스스로 만드는 창발과 전환은 없다. 사람다움, 사람다움이 뭉친 사회다움은 없다. 보수와 진보라는 조선일보가 만든 구도를 쓰면서 조선일보를 욕하고 있다. 사회주의, 자유주의, 보수주의, 수구반동이 맞다. 진보의 대칭어는 보수가 아니라 수구반동이다. 사회주의, 자유주의, 보수주의 모두 진보를 원하고 있다. 급진적 진보, 보수적 진보, 자유주의적 진보라고 해야 맞다. 보수의 대칭어는 급진이다.

진보가 무엇일까? 진보해야 하는 걸까? '이념'이 아니라 '이치'이다. 붕어빵틀로 주조되는 '평등'이 아니라 '어우러짐'이다. '통치'가 아니라 '자치'이다. '국가'가 아니라 '이웃과 마을'이다. 근대의 고장난 '이성'이 아니라 뭣뭣다움의 '영성'이다. '공동체'가 앞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이다. 시장과 소유의 '자유'가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다. '배달'이 아니라 '자급'이다. 각자도생의 시장에서 다투는 '시민市民'이 아니라 모시는 '시민侍民'이다. 국가의 신민 '국민'이 아니라 스스로 사람이 되는 '인민'이다. '노동'이 아니라 이루는 ''이어야 한다. '인권'만이 아니라 강물도 권리를 가지는 만인만물의 '천권'天權이다. 신약이 아니라 자연이 마스크다.

진보는 없다. 진보는 폐기되어야 한다. 원숭이가 인간이 되는 진보는 쓸모없다. 그렇다고 원숭이가 사라졌는가? 진보는 우승열패, 약육강식을 낳는다. 지구를 파괴하고 난민을 만들 뿐이다.

 

원래 마을은 이래야 한다. 영화 '위트니스 '의 한 장면
원래 마을은 이래야 한다. 영화 '위트니스 '의 한 장면

 

진보가 이룩한 성과는 공동체에의 헌신과 보호라는 전통 미덕을 각자도생의 경쟁으로 만들었다. 자유는 소유와 시장의 갑질이 되었다. 민주는 경쟁의 합법적 질서였다. 평등은 일할 의무의 평등이었을 뿐 권리의 평등이 아니었다. 자치자급자연의 삶은 성장의 시녀가 되어 지구와 인간을 약탈한다. 만인만물의 공동선이라는 국가는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다. 국가는 다만 부르주아지의 정치위원회이고, 유일당의 권력 기관이었을 뿐이다. 근대의 계몽주의자와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이 외친 진보는 이미 파산을 맞았다.

내 나라에서는 "총선은 한일전이다" 라는 낡은 국가주의, 고안된 발명품 민족주의가 진보라는 이름으로 행세한다. 섬뜩한 극우의 구호에 불과하다. 그 구호를 누가 썼는지 우리는 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를 지지한다. 괴물을 없애려다가 괴물이 된 사람들을 연민한다.

 

자연이 마스크입니다. 사진 뉴스1
자연이 마스크입니다. 사진 뉴스1

 

수운 큰스승님의 시로 2020년을 애도하며 2021년의 새 하늘 새 땅 새 사람을 연다.

 

"봄바람이 불어 간밤에 일만 나무 일시에 알아차리네.

하루에 한 송이 꽃이 피고 이틀에 두 송이 꽃이 피네.

삼백 예순날이 되면 삼백예순 송이가 피네.

한 몸이 다 바로 꽃이면 온 집안이 모두 바로 봄일세.

 

春風吹去夜 萬木一時知

춘풍취거야 만목일시지

一日一花開 二日二花開

일일일화개 이일이화개

三百六十日 三百六十開

삼백육십일 삼백육십개

一身皆是花 一家都是春

일신개시화 일가도시춘

<동경대전 시문>

 

신년특집 기고문은  전북포스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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