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농부
시인과 농부
  • 나종영 시인
  • 승인 2021.06.01 22: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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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휩쓸고 간 사월의 거리

한 떨기 꽃잎처럼 스러진 분노 앞에서

하얀 병실에 누워 각혈을 하듯

떨리는 손으로 베고니아꽃을 노래한 시인을 나는 안다

 

 

눈앞에 총알이 빗발친 거리

오월 광장에서 시를 쓰는 흰 손으로

시를 쓰는 대신 깃발을 들었던 사람,

핏물이 넘쳐 사람들이 죽어나간 거리

복받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두운 골방에서

총검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광주 그 피끓는 청춘을 노래한 시인을 나는 알고 있다

 

사월에 베고니아 꽃잎을 노래한 시인은 이제

시를 쓰지 않는다 그에게 시 쓰는 일은 하루를 사는 일이고

산다는 것은 흙을 손에 쥐는 일이다

그루터기만 남은 겨울 들판에서 새봄을 보는 그는

삽질 한평생 농사를 짓는 시인이다

 

오월 핏빛 거리에서 미친 듯 노래를 불렀던

시인은 이제 밭고랑 위에 서 있다

그는 밭으로 가서 흙 알갱이를 고르고

가슴에 품은 씨앗 하나를 심는다

 

푸른 이파리만 보아도 가슴이 둥둥 뛰어

물기 젖은 밭이랑 여기저기에 시를 쓰는 사람

쟁기질이 하고 싶어서 꿈에서도 워워 소를 몰고 가는

그는 천생 타고난 이 땅의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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